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사 1:10-17)
우리는 지난 주 말씀을 나누면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어떤 예배인지를 잠시 살펴 보았습니다. 가인이 드린 예배와 아벨이 드린 예배를 통해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중심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예배의 형식보다 예배자의 마음이었습니다.
한국 군대에 가면 모든 군인들이 경험하게 되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세례이고 또 다른 하나는 초코파이입니다. 군대에서 이 초코파이의 인기는 거의 하늘을 찌릅니다. 많은 한국의 젊은이들이 군목에 의해서 전도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초코파이가 전도를 합니다. 대단합니다. 이 초코파이의 선전에서 나오는 노래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무슨 말입니까? 마음으로 안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꼭 어떤 행동을 해야만 의사소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영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적 존재이시기에 우리가 그 분을 닮은 것입니다. 그래서 굳이 말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들이 우리 사는 이 사회속에는 많이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경험을 할 때가 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선물을 받았을 때, 비록 작지만 그 마음이 느껴져서 기쁘고 감사하게 되는 선물이 있는 반면에, 어떤 사람의 선물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리 마음 편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또한 그 사람이 준 선물은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왠지 나를 조롱하는 듯한 마음이 들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사할 때 사람들이 주는 선물을 보면서 기분이 상당히 안 좋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 제 아내에게 늘 이야기합니다. 내가 가장 아끼는 것, 잘 쓰는 것을 주어라고 말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로 주는 사람의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먹지도 못하는 동물을 가지고 제사를 드린 아벨을 받으신 이유는 창세기 4장 4절의있는 말씀처럼 아벨이 양의 첫새끼로 드렸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무엇이었습니까? 히브리서 11장 3절에서 알 수 있듯이 아벨이 드린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신 이유는 아벨의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벨이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이 믿음속에서 하나님은 아벨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믿음이었는가입니다. 비록 아벨 자신은 먹지도 못하는 동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예배할수밖에 없는 처지이지만, 자신의 형편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예배를 반드시 받으실 것이라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벨은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환경을 불평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자신이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좋은 것으로 드리고 싶은 마음에, 비록 그가 가진 것은 먹지도 못하는 가축밖에 없었지만, 그의 가축가운데 그해 첫 새끼를 구별해 두었다가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바로 이 부분이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이유인 것입니다. 즉 아벨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아벨의 중심이었던 것입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오늘이 벌써 사순절 네번째 주일을 맞이하는 날입니다. 사순절 네번째 주일을 맞이하면서 오늘은 우리가 드리고 있는 예배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우리 스스로 당당하게 참된 예배라고 말할 수 있는지를 되짚어 보길 원합니다. 예배자가 예배하러 나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영과 진리의 예배를 드리고 있는지 살펴보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1장 10-17절의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주전 8세기에 유다 나라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한 말씀의 한 부분입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서로를 돌아보며 바른 공동체를 이루는 일에는 애쓰지 않으면서, 예배만 성대하게 드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말입니다. 곧 예배 드리는 공동체가 마음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건성으로 교회에 나와서 예배 드린다고 앉아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싫다는 것입니다.
10절입니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놀랍게도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를 가리켜 '소돔'이라고도 하고 '고모라'라고도 하면서 거침없이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창세기 18, 19장을 보면 잘 아는대로 소돔과 고모라는 아브라함 시대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한 도시들입니다. 그런데 유다의 지도자들을 소돔의 관원으로, 유다 백성을 고모라 백성이라고 불르고 있습니다. 이 말은 현재 유다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심판받기 전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과 같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하나님께로부터 벌을 받아 망하기 직전에 놓여 있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 당시 유다 나라의 형편은 어떠했습니까? 애굽 종살이에서 벗어나 가나안 땅에 이른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 나라를 이루고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이 차례로 왕 노릇을 했습니다만, 솔로몬의 아들 대에 이르러서 나라가 북쪽 이스라엘 왕국과 남쪽 유다 왕국으로 갈라집니다. 주전 930년의 일이었습니다. 그 다음 208년이 지난 722년, 왕조가 자주 바뀌고 막판에는 일곱 번씩이나 군사정변을 겪었던 북왕국은 그 때 세계를 주름잡고 있었던 앗시리아의 손에 망하고 맙니다.
이 사건이 있기 전, 15년 전에 남쪽 유다 왕국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던 사람이 바로 이사야 선지자입니다.
무섭게 밀려닥치는 앗시리아의 세력에 북왕국 이스라엘이 망해가는 것을 본 이사야는 자기가 살던 유다 왕국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조금도 겁먹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되지 못하게 하는 온갖 사회악들을 없애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유다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이사야의 말에 조금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께 성대하게 제사를 드리고 이런저런 종교의식을 잘 치르기만 하면 그 사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신들의 종교의식을 지겨워 하시고 싫어하심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가 있는데 말라기라는 선지자입니다. 느헤미야와 동시대의 사람입니다.근데 이 말라기서 1장에 보면 재미있는 내용이 나옵니다. 함께 찾아 보시겠습니다. 말라기 1장 8절부터 함께 보시겠습니다. 오는 이사야는 이러한 잘못된 예배를 깨우쳐 주고자 오늘 본문에서 외치고 있습니다. 다시 이사야 말씀으로 돌아와서 1장 11-15절을 보십시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유다 사람들이 전국에서 모여와 예루살렘에서 숱한 짐승들을 제물로 잡아 하나님께 바치며, 음력 초하룻날, 안식일, 또 해마다 중요한 절기를 그들 나름대로는 거룩하게 지키고 열심히 기도하고 있지만,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는 조금도 고맙지도, 달갑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더 화나게, 지치게, 괴롭게 만들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다 사람들이 가져온 제물들도 받지 않으시고, 그들이 하는 기도도 듣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유다 백성들은 헛수고만 한 셈입니다. 그 모든 제사와 기도가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된 것입니다. 한 마디로, 헛되이 예배드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는 예배, 그것을 어찌 예배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는 기도, 그것을 어찌 기도라고 하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유다 사람들의 제사와 기도를 노엽게 보십니까? 15절 뒷부분에서 분명히 밝힙니다.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피가 가득 묻은 손으로 바치는 제물과 기도는 하나님께서 도무지 받으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제물과 기도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참된 제물과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손에 가득 묻은 피를 씻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손에 가득 피를 묻히는 일을 그만 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16절이 그것을 말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그들 나름대로는 정성을 다해 종교의식을 거행하고 있는 유다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그토록이나 간절히 바라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악한 행위를 버리고 선행을 배우는 삶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선과 악을 한 개인의 윤리적인 차원에서만 생각합니다만, 본문과 성경, 특히 구약 성경에서 말하는 선과 악은 그보다 더 넓은 뜻을 지닙니다. 선과 악을 뜻하는 히브리 말들을 문자적으로 보면,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뜻인데, 그 좋고 나쁨은 사람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느냐에 따라 정해진다고 합니다. 곧 사람의 삶을 좋게, 낫게, 넉넉하게, 기쁘게, 값지게, 보람 있게 하는 것이 곧 선이고, 사람의 삶을 나쁘게, 괴롭게, 모자라게, 힘들게, 뜻없게 만드는 것이 악입니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뭔가를 해도 마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Selfish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남을 돌아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만 좋으면 끝입니다. 남들이 힘들어서 죽어 나가던 상관 안합니다. 내 자식, 내 남편, 내 아내, 내 가족만 문제 없으면 괜찮습니다. 어떤 일을 해도 자원하는 심령도 아닙니다. 겨우 하는 척 합니다. 이들에게는 왜 해야 하는지, 남들이 왜 저렇게 어렵지만 고생하며 봉사하는지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생각만 합니다. 그렇다보니 남을 도울 생각도 안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앞서 15절 뒤에서 예배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손에 가득한 피가 무엇을 뜻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돌아보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남들이 어렵게, 힘들게 사는 데도 나만 괜찮으면 된다고 이기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마음으로하는 기도와 예배는 헛된 기도와 예배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또한 깨닫는 것은, 본문에서 말하는 악행은 결국 공동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일어나는 잘못, 인간 관계에서 생기는 죄를 가리킨다는 사실입니다. 이 점에서도 오늘 우리가 성경에서 말하는 죄의 성격을 다시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죄를 주로 나와 하나님 사이에 저지른 잘못으로 생각합니다. 그것이 틀리지 않습니다만, 성경은 또한 죄의 사회적인 성격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17절입니다.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공의'라는 말로 옮긴 히브리 말의 뿌리는 '판단하다', 곧 '옳고 그름을 가린다'는 뜻을 지닙니다. 이는 다툼이 있는 두 사람이나 두 편 사이에서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것이어서, '삼각관계'를 전제하는데, 옳고 그름이 제대로 가려진 상태를 '공의'라고 하겠습니다.
성경은 '공의'의 하나님께서 억울하게 괴로움을 겪는 힘없는 사람들 편이 되셔서 그들이「자기의 권리를 찾도록 도와주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그렇게 살기를 하나님이 바라신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본문이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라'로 옮긴 히브리어 표현조차 '고아의 권리를 찾아주라'는 뜻을 지닙니다.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는 히브리어 표현도 '과부가 이길 수 있도록 소송을 이끌어라'를 뜻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는 고아와 과부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를 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에서 깨닫는 바가 무엇입니까? 참된 예배란 바로 선과 공의를 행하는 예배, 참된 사랑의 나눔이 있는 예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배를 일컬어 영적 예배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진정한 예배는 바로 로마서 12장 1-2절에 있는 말씀처럼,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예배란 그냥 제 시간에 와서 찬송부르고 설교말씀 듣고 축도로 예배를 마치면 되는 행위가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란 바로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는 것이 바로 예배인 것입니다. 이런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받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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