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17:14-20(겨자씨 한 알의 믿음, 십자가)

오비도제일장로교회 2020. 5. 6. 08:26

겨자씨 한 알의 믿음, 십자가

(마태복음 17:14~20)

 

오늘 본문내용의 배경이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때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앙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어떤 고백입니까? 함께 고백해 보겠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고백이 있은 지 엿새 후,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 가운데 단 3,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거기서 3명의 제자들은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하시는 장면이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을 때 산 아래에서는 남아 있던 제자들이 큰 곤경에 처한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큰 곤경에 처한 이 사람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에게 치명적인 병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저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오늘 성경은 그의 아들이 간질병에 걸려서 몹시 고통을 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병으로 인해 생각지도 않은 불행이 일어나곤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불에도 넘어지고 깊은 물에도 빠지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버지는 한 시도 아들로부터 눈을 땔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픈 자녀를 둔 부모님들이라면 오늘 이 아버지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실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불치병에 걸렸있다라는 것이 우리에게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지만, 반면 그 안타까움의 무게 이상으로 우리는 아들을 향한 한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아들을 고치겠다는 한 아버지의 열정과 마음이, 마치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살리시고자 십자가에 자신의 독생자를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언제부턴가 잊고 지내던 하나님의 마음을 오늘 본문을 통해 다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작년, 어떤 분과 나눈 대화가 있었습니다. 타주에서 공부하고 있는 아들이 명절을 맞아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그의 아버지는 아들과 멋진 추억거리를 만들고자 아들과 함께 사냥을 가기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사냥하는 방법도, 사냥하는 기술도, 사냥도구도 없었습니다. 비록 사냥하는 방법도, 사냥하는 기술도, 도구도 없었지만 아들이 기뻐할 수 있게,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준비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함께 사냥을 가기로 한 곳의 주인에게 몇 날 몇 시 자신의 아들과 함께 사냥을 올 터이니 사냥감을 적당한 시간에 풀어놓아서 아들이 포획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들에게는 아버지가 준비해 놓았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게 해 놓고선 말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아들이 마치 우연히 사냥터에서 사냥감을 잡은 것처럼 준비해 놓고 아들이 기뻐할 것을 생각하며 즐거워하는 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분과 대화를 하면서 나도 언젠가 제 아들에게 이런 아버지가 되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이런 마음이시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도 모르지만 이미 우리를 위해 다 준비해 놓으신 자비로우신 아버지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아버지도 아들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고자했던 아버지였을 것입니다. 그는 아들을 고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어떻게든 아들의 병을 고쳐주려고 최선을 다하였을 것입니다. 용하다는 의원은 다 찾아갔을 것이고, 좋은 약은 다 구해다 먹여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효과가 없었습니다. 마지막 희망이 사라져 갈 쯤 그는 예수라는 분의 소문을 듣게 됩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예수라는 분은 못 고치는 병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께 나아가면 모든 소원을 이루어져 준다는 소문을 듣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아들이 고침받을 수 있도록 찾아 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저 제자들 아홉 명만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급한데로 남아 있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아들을 고쳐달라고 청을 했습니다. 분명 그 아버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들을 고쳐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아들의 병을 고쳐 주기는 커녕 오히려 소란만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셨을 때, 그 아버지는 예수님께 자신의 아들을 고쳐 달라고 달려갔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오늘 본문의 17절의 말씀이십니다. 같이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오늘 본문에서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 화를 내신 대상이 누구인가라는 것입니다. 지금 누구에게 화를 내고 있으신 것 같습니까? 제자들입니까? 아니면 아이의 아버지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그 곳에 모여 있는 모든 무리들입니까? 오늘 본문은 분명 예수님께서 변화산 밑에 모여 있던 무리들에게 화을 내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화를 내셨냐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을 열받게 했으니 예수님께서 화를 내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으로 하여금 열받게 한 것이 무엇이었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 해답이 오늘 본문의 내용을 파악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마가복음에서는 오늘 본문의 내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같이 마가복음 9 14-19절을 함께 교독하겠습니다.

 

14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

15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16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17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 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19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뭐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까? 지금 귀신 들린 한 아이때문에 변론 즉 논쟁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1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겠습니다.

 

14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

 

물론 서기관들이 무리들과 함께 무슨 내용으로 논쟁을 하였는지는 우리는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논쟁함이 예수님으로 하여금 열받게 했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그 논쟁을 지켜보시던 예수님께서 열받으셔서 하신 말씀이 방금 전 읽었던 마가복음 9 19절의 말씀이십니다.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그런데 마태복음에서는 이 구절의 말씀을 더 강한 어조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7 17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꾸짖고 계십니다. 마태는 마가복음에 없는 내용까지 덧붙이고 있습니다. 패역한 세대라고 합니다. 영어사전을 찾아보면 이 패역하다는 의미가 아주 고약한 버릇을 가지고 있다는 뜻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무리에게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냐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오해와 착각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무슨 오해냐 하면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와 오늘 병든 아이를 고치지 못한 것을 연결해 버리는 심각한 오류를 범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를 믿음이 없으니까 병든 아들을 고치지 못했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그런 내용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모인 무리를 향하여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라고 외친 마가복음 본문을 잘 살펴 보면 예수님께서 역정을 내신 이유가 제자들이 아이의 병을 믿음으로 고치지 못한 것에 대한 역정이 아니라 정작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는 않고, 쓸데없는 사소한 것에 논쟁하기에만 급급했던 모인 무리들의 모습을 꾸짖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설명하고 있다고 했습니까? 예수님이 누구시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자 하신 것이 기적을 베푸신 이유였습니다. 근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리들은 정작 중요한 것에는 관심이 없고 쓸데없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에 대한 관심은 없고 쓸데없는 것에만 마음을 쏟는 이들을 향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라고 말입니다. 혹시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정작 나의 구원의 문제는 관심없이 교회를 다니고 있지는 않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직까지도 구원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받았다고 착각하고 있는 신앙생활은 아닌지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재미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아이를 고쳐주신 후,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묻는 내용입니다. 마태복음 1719절의 말씀입니다. 함께 보시겠습니다.

 

이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는 어찌하여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0절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못할 일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여기에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면 그대로 될 것이다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과연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으면 우리도 산을 옮기는 그런 기적을 이룰 수 있는 것일까요? 만약 우리가 산을 옮기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이 아직 겨자씨만하지 못해서 그런 것일까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요? 겨자씨 한 알의 크기를 보시겠습니다.

 

 

일반적으로 생각해 보면 겨자씨 한 알의 믿음이라면 그야말로 가장 작은 믿음, 보잘 것 없는 믿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씨앗이 겨자씨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작은 믿음이산을 옮긴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여러분,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라면 어떤 믿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다같이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찾아 보겠습니다.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2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사도 바울에 의하면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란 모든 믿음, 즉 완전한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는 것은 작은 믿음이라는 뜻이 아니라 완전한 믿음, 즉 모든 믿음이라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겨자씨만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저와 여러분이 완전한 믿음을 가졌느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완전한 믿음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오늘 마태복음 본문의 말씀은 특이하게도 예수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앞 뒤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 이야기를 들었던 제자들은 두 번 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 다음에 나오는 내용에는 제자들이 매우 근심했다고까지 말합니다. 이런 말씀을 기초해서 생각해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란 바로 십자가가 무엇인지 이해한 완전한 믿음을 말씀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이해한 완전한 믿음이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믿음이란 도깨비 방망이와 같이 내가 기도하면 내 마음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믿음이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란, 바로 구원의 확신을 가진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고 신약성경을 읽어 나갈 때, 사도행전 이후에 나오는 서신서의 내용들이 이해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에 대한 정의가 없이 신앙생활을 하다보니 성경에 기록된 기적이야기를 보면 흥분되어지고 쓸데없는 맹신을 하려고 하는 것니다. 가령 예를 들어, 베드로처럼 물 위를 걸어보겠다고 바다 위에 뛰어드는 것 같은 것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은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확신이었던 것입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 그 어떤 어려움도 어떤 환경에서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하신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죽음도 극복하실 수 있는, 흔림없는, 요동치 않는, 좌절치 않는 큰 믿음을 가지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바로 그런 믿음을 가지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박해가운데서도 믿음의 흔들림이 없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환경에서 오는 혼란과 어려움이 그들의 신앙을 흔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말합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히브리서 1133-38절입니다.

 

33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34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맹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십자가 구원의 확신이 있는 자들만이 인내하고 참아내며, 끝까지 견뎌내는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저 높은 산과 같은 우리 앞에 놓인 장애물도 믿음으로 극복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바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이라도 있다면 산을 옮길 수 있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정말 믿음가지고 기도하면 산이 움직여진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은 확고부동한 구원의 확신을 가진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구원의 확신이 있는 성도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확신이 있기에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는 기뻐할 수 있고,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믿음인 것입니다. 이런 진정한 믿음을 가진 성도가 있는 우리 교회가 바로 디트로이트를, 미시간을, 북미를,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십자가의 순교를 각오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에게 구원의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런 각오를 통해서 산보다도 더 높은 로마제국이 기독교 국가로 변화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산이 옮겨진 것입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그 근본 바탕에는 반드시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삶이 변화되기를 소원하십니까? 내 가정이 변화되기를 소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구원의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셔야 합니다. 구원을 확신하는 올바른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리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습니다. 남들 다 안 된다고 해도 우리는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원의 확신이 있는 성도들은 천국을 향해 가는 출국심사를 마친 성도이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불의 앞에서 절대 타협하지 않습니다. 내 경험과 내 생각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이해가 되지 않지만 말씀대로 살려고 하기에 주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구원의 확신이 있는 성도는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는 권세를 가진 성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이 없다면 우리가 아무리 기도를 한다해도 그것은 허공을 울리는 꽹과리나 다름없는 성도일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구원을 다시 한 번 재조명해 볼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인해 나의 구원이 이루어졌음을 다시 한 번 고백해 보는 시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