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16:21-28(십자가의 道)

오비도제일장로교회 2020. 5. 6. 08:17

십자가의 도()

(마태복음 16:21~28)

 

젊은 나이에 결혼을 해서 아들 독자만 낳아 애지중지 키운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덧 세월이 흘러 그 아들이 20대 초반의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런데 빨리 손주가 보고 싶었던 이 부부는 아들 역시도 자신들처럼 일찍 결혼하게 하였습니다.

 

자신의 손주를 빨리 보고 싶었던 시어머니는 신혼여행에서 막 돌아온 며느리를 데리고 결혼 주례를 해 주신 목사님을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그 시어머니는 목사님께 며느리가 자녀를 빨리 가질 수 있도록 축복기도를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교회 담임목사님께서도 결혼주례는 이 신혼부부가 처음이라 새색시를 위해 힘있게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날 따라 목사님도 기도발이 서는 것이었습니다. 입에서 침을 튀겨가면서 기도해 주셨습니다. 하지만 새색시는 자녀를 빨리 낳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영 마음에 맞지 않아 목사님께서 기도하시는 내내 '아멘'으로 화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시어머니는 이런 며느리의 마음도 모른 채 목사님께서 한절 한절 기도하실 때마다 큰 소리로 '아멘 아멘'하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리고 일년 뒤 진짜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시어머니가 둘째 아들을 낳았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아멘'으로 화답하실 때 놀라운 기적을 맛보게 되실 줄 믿습니다.

 

신약성경의 첫 번째 책인 마태복음을 읽다보면 마태복음의 저자인 마태가 쓴 글, 즉 문장의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마태는 글을 시작할 때 종종 시간을 나타내는 표현이나 구절을 자주 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 1절에 보면,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13절에서도,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여기서 저희라 함은 동방박사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219절에서도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의 글쓰기 특징입니다. 이런 특징을 기억하고 마태복음을 읽으면 조금 더 흥미롭게 마태복음을 읽어 내려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표현들 중에 많이 나타나는 것이 그 때에, 혹은 그 무렵에와 같은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 때에라는 단어는 마태복음에서 무려 23번이나 나오고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는그 무렵에라는 단어는 다섯 번씩 나옵니다. 그러니까 마태는그 때에”, “그 무렵에와 같은 단어로 문장을 시작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시간의 흐름도 나타내고 내용의 변화도 나타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단어와 약간 차이가 있지만, 매우 중요한 내용을 전개하거나 변화를 암시하는 말이 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로 이때로부터라는 단어입니다.

 

“이때로부터라는 단어에서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대로이때부터무언가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마태복음 전체를 통해 단 두 번밖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첫 번째가 마태복음 417절의 말씀입니다.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바로 이 구절을 기준으로 해서 그 앞부분이 예수님의 공생애 준비과정이라면 이 구절 이후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활동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기자는이때부터라는 짤막한 단어를 이용하여 이제 예수의 생애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단어가 마태복음에 한 번 더 나오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의 본문입니다. 16 21절입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16장까지 오면서 예수님께서는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죽음에 대하여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저 설교하시고 기적을 베푸시고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버리실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이셨습니다. 또한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밝히는데 집중해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바로 전인 16 13-20절에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보게 됩니다. 어떤 고백입니까? 우리가 잘 다 암송하다시피하는 고백입니다. 함께 고백해 보겠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

 

그리고 이 고백 이후, 예수님은 한 가지의 기적을 20장에서 한 번 더 일으키신 후에는 더 이상 기적적인 일을 일으키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십자가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더 집중하시는 삶을 사시게 됨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처음 교회에 나오시게 된 계기가 무슨 이유에 의해서이셨습니까? 모태신앙으로 자란 분들은 부모님과 함께 교회를 다니다보니 자연스럽게 다니게 되신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남편 때문에, 어떤 분들은 아내때문에, 어떤 분들은 자녀 때문에, 어떤 분들은 사업장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때 누가 교회에 나가보라고 해서, 그리고 교회나가면 뭔가 해결책이 있을 것 같아서 교회를 나오게 되셨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교회에 처음 나왔을 때 목사님께서 하시는 설교을 듣고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전혀 알아 들을 수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래도 매주 교회에 나가다보니 만나는 사람들도 좋고, 뭔가 끌리는 마음으로 다니다가 말씀을 듣는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평범한 사람들과 같은 분이 아니시다라는 것을 알게 되고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고 기적을 일으키신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느 덧 마음속에 예수님이 누구신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나면서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나를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구나라고 믿어지고 그리고 참된 회개를 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우리는 참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 속에서 반드시 거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고백은 처음부터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정리를 하고 나서 그 다음으로 우리에게 질문되어지는 것이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는가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왜 죽으셔야만 했는지를 알게 될 때 우리에게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그리스도인의 믿음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누구신가와 십자가가 무엇인가를 깨닫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관계를 아는 것이 바로 믿는 자들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교회를 개척하고 막 사역을 시작할 쯤, 교인들을 늘리기 위해 별의별 짓(?)을 다 해 봤습니다. 수많은 것들을 다 시행해 보고 내린 결론이 하나 있었습니다. 교회를 성장시키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제가 깨달은 것은 전도였습니다. 오직 전도만이 교회를 성장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전도를 시작했었습니다. 처음 전도할 때 혼자 나갔다가 혼이 난 적이 있어서 그 다음부터는 혼자 나가지 않고 몇 명을 데리고 나가서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저뿐만 아니라 처음 전도하시는 분들과 전도를 나가다 보니 처음 전도 나가시는 분들이 전도를 매우 어려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전도할 때 많은 분들이 어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는 자주 안 해봐서 어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것이 민망하게 느껴져서 어려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어려워 하는 이유는 거절 당할까봐 두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전도하는 사람들이 주는 전도지를 곱게 잘 받지 않습니다. 전도하다 보면 별 사람 다 만납니다.

세 번째는 전도하다 보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루 전도했다고 몇 십명씩 전도되는 것이 아닙니다. 몇 달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나도 겨우 한 두명 전도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기다리는 것은 무척 어렵습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전도하기를 어려워합니다. 그런데 전도하는 방법 중에 제일 원시적인 전도방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처음부터 무작정 예수님에 대해서 전하겠다고 십자가이야기하고 죄에 대해서 얘기하고, 예수 믿으면 천국가고 예수 안 믿으면 지옥간다고 들이대는 것입니다. 이런 전도방법은 예수 복음을 전하기 보다, 오히려 예수와 교회에 대해서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전도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이런 전도가 믿지 않는 사람들로 핑계치 못하게 함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지혜로운 전도 방법을 선택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도를 할 때, 처음부터 원색적인 내용으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예수님께서도 본인의 구원사역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 위해서 처음부터 자신이 이 땅에 왜 오셨으며 십자가가 무엇이며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16장의 베드로 고백이 있기까지 예수님께서 수많은 기적을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보여 주시면서 사람들과 베드로가 예수님이 누구신지 고백을 하게 하신 후 그리고 나서 진짜 예수님께서 말씀하길 원하셨던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지금까지 보여주셨던 기적이나 예수님의 설교는 이 십자가를 이야기하기 위한 양념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처음 교회를 다니면서 믿음이 없을 때는 개인적으로 체험하는 신앙생활을 많이 의존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야 또 교회다니는 맛도 재미도 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병들었던 몸이 기도하니까 낫게 된다던지, 어렵게 운영되던 사업장이 극적으로 회생되고, 어려웠던 가정이 회복되고, 안 되던 일들이 잘 풀리고, 뭐 이런 저런 일들이 있어야 교회에 발을 붙여놓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이 어느 정도 자라나기 시작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예전에 그렇게 기도하면 응답도 금방금방 되던 것들이 이제는 기도해도 예전보다 신통하게 응답되지 않습니다. 잘 되던 일들도 더 열심히 교회에서 봉사하고 일하는 데도 불구하고 잘 되지 않습니다. 마냥 착하게만 보이던 성도들이 어느 순간부터 좋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서 실망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교회에서 말썽이 일어납니다. 더 이상 기적적인 일들이, 체험적인 일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만약 이런 일들이 지금 여러분들에게도 있습니까? 그렇다면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여러분의 신앙생활이 더 이상 어린 아이와 같은 모습이 아니라 성장할 때가 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우리의 신앙을 자라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사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이 달콤한 시간만 있을 수 없습니다. 이제부터는 단단해 질 순간이 된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기적만을 바라보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장은 하는데 성숙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처음에는 기적적인 일들로 인해 교회를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자라서 십자가의 도까지 이르러야 하는데 거기까지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늘 젖먹이 아이처럼 달콤한 신앙생활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님의 말씀도 좋은 말씀만 해 주길 원합니다.

 

신앙적으로 책망하는 설교를 하면 귀를 열고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듣기 좋은 소리만 해 주길 바랍니다. 문제는 이렇게 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면 오죽 좋겠습니까? 그런데 우리의 구원이 이 십자가 신앙을 가지지 않고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해도, 오늘 본문이 말하는 십자가의 의미를, 십자가의 도를 깨닫지 않고는 절대로 우리의 구원을 이룰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우리 교회에 발을 들여놓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친교를 위해서 오셨습니까? 아니면 주일이나 수요일날 다른 데 갈 데가 없어서 오셨습니까? 이민사회에서 남들 다 교회나가니까 하는 수없이 오셨습니까? 그건 아니실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는 것은 죽어 천국가기 위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합니다. 26절입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아무리 천하를 얻은들 우리의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교회 끝까지 잘 다니다가 천국 못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교회를 잘 못 섬겨서 천국 못간 것이 아닙니다. 그런 분들이 교회 직분자들이 아니어서 천국 못 간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교회에서 봉사도 열심히 하고 남들보다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했지만 끝에는 천국 못가고 지옥가는 이유가 뭡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십자가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적인 이야기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기적적인 이야기에 열광하라고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고 하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가 홍해를 가른 것에 열광하면서 홍해가 갈라지게 된 기적이 우리 삶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홍해의 기적을 보여주시면서 그런 기적적인 삶을 기도하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홍해가 갈라지는 것과 같은 아주 놀라운, 기적과도 같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받았음을 믿으라고 말씀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적이 아니라 기적과 같이 우리에게 주어진 구구원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면서 자신이 누구신지,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되시는 분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정도로 우리의 구원문제가 심각하며 우리가 받은 구원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요 너무나도 값진 것임을 말씀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값진 대가를 치러서 저와 여러분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저 공짜로 구원받은 것 같아도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대가를 치르고 난 후에 얻어진 결과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 십자가에 대해서 오해합니다. 22절의 말씀을 같이 보겠습니다.

 

22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뭐라고 그럽니까? 십자가를 질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오신 것인데, 우리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십자가의 사건이 있어야 하는데, 십자가를 지지말라고 합니다. 어려운 길을 가지 말라고 말합니다. 쉬운 길이 있는데 왜 십자가 질려 하냐고 합니다.

 

우리들도 믿음 생활하다보면 십자가를 지기 싫어합니다. 쉬운 길을 가고 싶어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지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미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21-23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3절에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십자가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련해 보인다고 합니다. 십자가의 삶을 사는 것이 어리석게 보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을 했다면 반드시 십자가의 도를 쫓아서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된다고 말입니다.

 

그 말씀이 오늘 본문 16 24-25절입니다. 함께 보시겠습니다.

 

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구원받은 성도라면 반드시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라면 반드시 자신의 십자가를 날마다 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럼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란 바로 나를 부인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란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당연한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삶을 피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쉬운 길을 선택하거나 어려움을 피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란 내 목숨이 달려 있는 문제입니다. 그것을 정면으로 맞서야만 하는 것입니다.

 

제가 말씀 중간에 전도에 대해서 조금 언급한 것이 있습니다. 전도할 때,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근데, 전도하면서 어려워하는 진짜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그게 뭔지 아십니까? 바로 전도하는 가운데, 어려움을 당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전도하다가 챙피당하는 것이 싫어서 그런 것입니다. 무시당하고 싶지 않아서 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전도할 때 당연히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걸 피할 수 없습니다. 피해서도 안 됩니다.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그걸 피해서는 안 됩니다. 그걸 피할 수 없습니다. 피한다면 우리는 전도할 수 없습니다. 당연히 무시도 당합니다. 그걸 이겨내야만 전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도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삶을 우리는 버릴 수 없습니다. 구원받은 자에게는 반드시 십자가와 같은 고통스런 삶이 주어집니다. 마냥 사탕과 같은 달콤한 신앙생활이 있을 수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부흥집회나 간증집회에서 다른 사람들의 성공담을 듣고 흥분합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성공담 뒤에는 반드시 십자가의 삶과 자기를 부인하는 삶이 있었던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성공을 보면 그 성공이 그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으로만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지금 고백한다. 만약 하나님께서 다시 그 길을 가겠냐고 한다면 자신없다고 말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광스런 삶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십자가의 삶과 길을 가셔야 합니다.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No Cross! No Crown!

 

십자가없이 영광도 없습니다. 나를 부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내 십자가를 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 십자가 집어 던지겠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저는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개개인의 십자가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묵묵히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절대 나를 부인하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내 생각, 내 습관, 내 경험, 다 버리셔야 합니다. 나를 부인한다는 것은 나를 거절한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서 솟아오르는 좋지 못한 것을 날마다 죽이며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십자가를 부인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우리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고백합니다.

 

내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나를 부인하는 삶입니다. 내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며 사는 삶이 바로 십자가의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살 때, 영생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십자가의 영광이 함께 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