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18:15-20(십자가, 하나님의 능력)

오비도제일장로교회 2020. 5. 6. 00:43

십자가, 하나됨의 능력

(마태복음 18:15~20)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대해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믿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란 결코 신분과 계급, 남녀와 노소, 빈부의 차이가 없이 모두가 평등하고 하나인 나라, 비록 지금은 무시받고, 손가락질 받는 처지에 있지만 언젠가 예수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오면 누구도 차별받지 않는, 너와 내가 하나된 나라, 그 나라가 하나님 나라라고 믿었습니다.

 

사람들은 분명히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실 때, 이방인이라고 해서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사회적으로 천시받는 직업과 천시받는 사람이라 해서 외면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회적으로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이들에게 직접 찾아가셔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이루어졌음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방나라의 백부장이라 할지라도 그의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개처럼 취급받던 이방인 여인이라 할지라도 그녀의 딸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율법적으로 저주받았다고, 그래서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되던 나병환자도 치료해 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창기들과 세리들과 이방사람들과 어울려 함께 먹고 마시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셨고, 그들에게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3년간이나 따라다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인지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18 1절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마태복음 18 1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물론 1절에서 제자들이 말한 천국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으로 죽어 가는 천국을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은 며칠 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왕으로 통치하게 될 지상의 나라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하나님 나라 안에서도 세상나라와 같이 자신들 가운데, 누가 높은지, 누가 낮은지를 가려 달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은, 제자들이 생각했던 그런 세상적인 나라나 공동체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천국은 도대체 어떤 곳을 말씀하신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 1817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7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어떤 단어가 등장합니까? '교회'라는 단어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예수님 당시에는 교회라는 공동체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는 '교회'라는 단어를 마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란 어떤 곳입니까? 예수님을 구세주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주님으로, 왕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두세 사람만 모여도 그 모인 곳이, 그 모인 무리가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모인 이 곳이 교회이고 우리가 교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20절의 말씀 때문에 그렇습니다. 20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예수님을 구세주로, 주님으로, 왕으로 고백한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누가 함께 하시겠다고 하십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고 하신 겁니다. 왕이신 예수님이 친히 우리 가운데 임재해 계시겠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믿으십니까?

 

그래서 하나님 나라란 엄밀히 따지면 예수님을 모신 그 어디나 다 하나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찬송가의 가사에도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찬송가 495장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1

내영혼이 은총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3

높은 산이 거친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런데 후렴부의 가사를 영어로 보면 더 의미가 정확합니다.

 

O Hallelujah, yes, 'Tis Heaven, 'Tis Heaven to know my sins forgiven;

On land or sea, what matters where? Where Jesus is, the Heaven is there.

 

예수님이 함께 계시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나라가 바로 교회라고 말씀하는 것이 오늘 본문 17절과 20절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18장의 내용은 무슨 내용을 말하는 말씀이겠습니까? 바로 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천국에서 큰 자가 누구냐고 묻는 이 질문은 다른 말로 하면 교회안에서 큰 자가 누구냐를 묻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도 제가 물어 보겠습니다. 교회에서 큰 자는 누구입니까? 4절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누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겸손한 자입니다. 교회안에서는 큰 자가 누구냐하면 바로 겸손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믿는 자들이 교회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말씀해 주셨습니다. 10절입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교회안에서는, 교회생활을 할 때는 서로 업신여기지 말고 서로 존중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서로 업신여기지 말고 서로 존중하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느 누구 하나 소홀히 다루어질 수 있는 사람은 한명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12-14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12 너희 생각에는 어떻겠느뇨 만일 어떤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 이와 같이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무슨 내용입니까? 여기 계시는 성도 한분 한분이 다 소중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없어서는 안 되시는 존귀한 분들이라는 말입니다. 옆의 사람과 인사하겠습니다.

 

'당신은 내게 정말 소중한 존재입니다.' 한번 더 인사하시겠습니다.

'절대 딴 데 가시면 안됩니다.'

 

그런데 간혹 교회생활을 하다보면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생각지도 않은 실수와 허물들이 만들어집니다. 교회안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문제는 더 많아집니다. 더욱이 교회 안에서 덕이 되지 않는 일들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있을 때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법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의 경험과 생각으로 그 사람을 다루려고 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5절부터 17절의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16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17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먼저는 그 문제의 당사자에게 개인적으로 찾아가 권면하라고 말합니다. 권면이란 상대방을 존중하는 가운데 분명히 죄를 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개인적으로 권고하라고 하십니까? 이 말은 개인적으로 먼저 이야기해야 상대방을 존중하는 가운데 문제를 풀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 보면 어떤 면에서는 개인적으로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면, 아예, 꺼내지 말라는 말도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문제가 일어났을 때 문제를 크게 만들지 말고 먼저 개인적으로 권면하라는 말입니다.

 

만약 개인적인 권면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듣지 않으면, 그 다음 단계는 몇 사람이 함께 가서 다시 권면하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안 들으면 어떻게 하라고 말씀합니까? 그때에는 그들을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여기서 헷깔리십니다.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기라라는 말을 듣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교회안에서 치리하라고 말입니다. 즉 교회의 권고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는 출교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17절의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기라라는 말씀이 정말 그런 뜻이겠습니까? 교회의 권고도 무시하는 이들을 교회가 정해서 내쫓아도 무관하다라는 말이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자녀가 정말 씻지 못할 잘못을 해서, 그리고 몇 번의 야단과 경고에도 불구하고 계속 나쁜 짓을 멈추거나 고치지 않는다 해서 호적에서 빼버리는 부모가 있으십니까? 물론 법적으로도 그렇게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설사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해도, 아무리 자식이 속을 썩히는 일을 한다손 쳐도 부모는 절대 자식을 내치지 않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십니다.

 

세상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쉽게 버릴 수 있습니다. 그게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인 교회는 누군가가 죄를 짓고 회개치 않는다고 해서 즉각 내쳐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늘 17절에서 말한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기라는 말씀은, 죄를 돌이키지 않는 저들을 무시하고 내쳐라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방인과 세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그들을 끝까지 참고 기다리고 사랑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어디에서도 예수님은 이방인과 세리들, 창녀와 같은 이들을 향해 욕하시거나 저주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한번 기억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는 출교하지 않고 회개치 않은 자들을 더 불쌍히 여겨야 한다고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그들을 그렇게 하면 반드시 그들은 돌아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참고 기다리면 반드시 돌아옵니다.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그들이 돌아오게 하기 위해선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 마지막 말씀, 18-20절을 보시겠습니다.

 

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19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도하면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반드시 기도하는 데로 이루어 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방황하는 저 영혼을 위해 기도하면 구원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안에서 저 사람이 나와 마음이 맞지 않다고 해서, 안 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저 사람이 실수 했다고 해서 안 된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그 사람을 위해 더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분명히 주님은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면 이루어 주신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쉽지 않습니다. 그 사람을 생각만 해도 쓴 물이 속에서 올라옵니다. 잠도 잘 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십자가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대체 십자가가 뭐길래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는 것입니까?

 

원래 십자가란 로마가 통치하던 시대, 죄를 지은 죄인가운데 죄질이 아주 나쁜 죄인들에게만 쳐해졌던 처형방식이 십자가의 형벌이었습니다. 죄인을 십자가에 손과 발을 묶거나 대못으로 박아서 고통가운데 서서히 죽어가게 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란 극악한 죄인들만 지게 되는 형벌이자 극악한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죄에 대한 대가가 얼마나 무섭고 무거운지를 눈으로 보게 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죽음의 상징이었고 두려움의 상징이었습니다. 누구도 그 십자가의 처벌만큼은 받고 싶지 않은 무섭고 떨리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절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십자가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로부터 두려움과 떨림으로 외면당하던 십자가를 하나님께서 바꾸셨습니다. 공포와 죽음의 상징이던 십자가를 희망과 소망으로 바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죽으신 자리인 십자가를 더 이상 저주의 자리가 아니라 복된 자리로 바꾸셨습니다. 예전의 십자가는 죄에 대한 대가지불 장소였지만, 예수님께서는 용서와 화해의 자리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우리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허물많은 죄인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주고 아픔을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불쌍한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이 나의 죄를 위해 대신 지신 그 십자가로 인해 새생명을 얻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영원한 저주 아래 있던 나를 다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세상사람들이 보기에는 저주의 상징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능력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둘을 하나로 온전케 만드는 능력입니다. 갈라진 우리의 마음을 하나되게 하는 능력입니다. 분열된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능력입니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고, 다른 사람은 다 몰라도 저 사람만큼은 안 된다고, 용서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우리에게, 십자가는 아니라고, 용서할 수 있다고, 다시 회복될 수 있다고, 다시 하나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우리 모두는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도 덜 소중한 사람이 없고, 누구도 더 소중한 사람이 없는 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됨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 붙들고 기도할 때 하나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이 자리에게 계시는 분들 가운데 분열의 아픔과 용서치 못하는 상한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십자가 붙들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반드시 깨어진 우리의 관계와 아픔을 회복시킬 수 있는 하나됨의 능력입니다. 그 십자가의 능력이 오늘 저와 여러분을 새롭게 만들고 갈라진 것을 다시 하나되게 하는 복된 날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