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 예수 그리스도
(마태복음 1:18-25)
오늘 날 교회를 출석하는 교인들에게 예수님은 누구신가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구세주, 혹은 제2위이신 하나님, 또는 내 죄를 위해 죽으신 분 등등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부를 때 많이 쓰는 말이 ‘구세주(Savior)’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부르는 데는 아무 이유없이 무턱대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남들이 다들 그렇게 부르니까 나도 따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부를 때는 정확한 성경에 근거해서 부르는 것입니다. 방금 전 우리가 읽었던 성경 마태복음 1장 18-21절의 말씀이 왜 예수님을 우리가 구세주라고 부르는 지에 대한 정확한 성경적 근거를 말해 줍니다. 21절의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오늘 예수님의 탄생이야기는 대강절을 맞이하는 성도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태어나셨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우리가 교회를 오래 다니지 않았다 할지라도 혹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 비기독교인이라 할지라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에게는 정혼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약혼한 남자와 결혼을 하기도 전에 덜컷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큰일났습니다. 이 당시 법에 의하면 약혼하고 결혼을 앞 둔 여인이 임신을 하게 되면 돌로 쳐 죽이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돌로 쳐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게 된 약혼한 이 남자가 조용히 이 여인과 파혼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근데 그 때 이 남자에게 한 천사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남자에게 이야기합니다. 자신과 약혼한 여인에게 임신된 아이는 성령으로 잉태된 아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아이가 태어나게 되면 사내아이가 태어나게 될 것인데 그 이름을 예수라고 불러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장차 이 아이가 커서 그의 백성을 구원할 구세주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탄생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라 부르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 때문에 엄청난 대가를 치르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마태복음 1:21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무엇에서 구원해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바로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의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입니다. 그러나 죄로부터의 구원은 그냥 대가지불없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합니다. 성경 로마서 6장 2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이 말씀은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대가지불은 오직 죽음으로 밖에는 지불할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지은 죄는 죽음으로써만이 해결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3절에서 말하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다”라는 말은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라는 것을 말하는 말입니다. 죄로 인해 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이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반드시 구원받기 위해서는 인간이 지은 죄와 그 결과로 발생한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구원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죄를 위해 누군가 그 엄청난 대가지불을 하셨다는 말합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지시고 죽으심으로 십자가상에서 나의 엄청난 죄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대가지불을 통해 예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위해 천국문을 활짝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즉 구원의 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믿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교리를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천국문을 들어가고 싶다고 해서 그냥 아무나 막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열어 놓으신 그 구원의 문을 통과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한가지 통과의례가 있음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19장에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예수님과 삭개오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시는 길에 여리고에서 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그가 바로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는 어떤 사람입니까? 누가복음 19장 2절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삭개오의 직업은 세리였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예수님 당시 사회에서 세리란 바로 민족의 반역자요 죄인의 대명사로 불리던 시기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서 죄인으로 분류된 부류들이 있었습니다. 창기와 세리,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죄인라고 손가락질 받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삭개오는 그냥 세리가 아니라 세리장이었습니다. 이 말은 죄인중에 죄인이요, 괴수중에 괴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부자였다고 합니다. 부자가 뭐가 잘못된 것입니까? 부자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기의 부자란 권력에 붙어서 부를 축척한 매국노로 여겨지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부자라고 하면 가난한 자들의 피를 빨아먹는 아주 좋지 못한 사람들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다가 그는 신체적으로 결함까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시는 데로 그는 키가 작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기 위해 뽕나무 위로 올라갈 수밖에 없는 신체적 결함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신체적 결함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하나님께 죄를 지어서 버림을 받은 자라고 여겨지던 사회였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앞을 보지 못하는 소경을 고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때 제자들이 묻는 말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요 9:2)
신체적 결함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은 죄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런 삭개오에게 사회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자에게 예수님께서 찾아 오셨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삭오개를 향하여 ‘죄인’이라고 공공연하게 떠들어 대었지만 우리 주님은 신경쓰지 않으셨습니다. 누가복음 19장 7절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예수님은 어떤 자를 찾으십니까? 죄인을 찾으시는 주님이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죄인이라고 욕하고 손가락질하며 사람 취급조차 해 주지 않을지라도 우리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그분은 오히려 죄인된 자들를 먼저 찾아 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죄인들의 친구’라는 별명까지도 가지고 계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자신을 공공연하게 대적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의인들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은 의로운 나의 모습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죄로 물든 나의 상처난 모습을 보시며 내게 다가 오십니다. 그 분이 나를 찾아와 주십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분께 가지 못하기 때문에 그분이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주님을 찾을 때 주님의 나를 찾아와 주십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예화: 그가 교황이 되었을 때, 첫 해 성탄절을 맞이하여 간 곳-교도소와 고아원]
예수님은 자신을 보고자 자신의 신체적 결함을 극복하면서까지 간절히 매달렸던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신앙생활을 하면서 조그만 어려움이 그들에게 닥쳤을 때 몇 번 기도해 보지도 않고 정말 혼신을 다해 부르짖어 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성도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또한 그래 놓고는 하나님은 자신들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단정해 버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기도해도 소용없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오늘 삭개오를 만나신 주님은 우리에게 주님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 반드시 만나 주심을 보여 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생겼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을 간절하게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 ‘간절히’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懇 切
(간절할 간, 끊을 절)
한자적으로 해석을 하면 ‘심장을 자른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간절히 무언가를 찾는다는 것은 심장을 도려낼 정도로 고통스럽게 찾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찾을 때에 이렇게 찾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간절히 찾을 때 우리 주님은 반드시 우리를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잠언 8장 17절을 보시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그런데 잠언 8장 17절에 나온 ‘간절히’라는 단어는 저와 여러분이 가진 성경을 보시면 그 각주에 뭐라고 되어 있냐면 ‘새벽에’라는 말로 바꿀 수 있다고 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간절히 – 새벽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싶으십니까? 그러면 새벽에 나오시면 됩니다. 새벽에 나오는 자들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들인 것입니다.
어째거나 우리의 문제는 주님을 만나야만 해결되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방법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발버둥쳐 봐도 소용없습니다. 오직 주님 앞으로 가지고 나올 때만이 해결받을 수 있게 됩니다.
삭개오가 구원받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을 간절히 찾는 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만 가지고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다른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무엇입니까? 회개입니다. 지금 삭개오는 어떤 회개를 하고 있습니까? 진실된 회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자신의 삶의 태도를 완전히, 180도로 바꿔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변화입니다. 교회 나와서 예수 믿고 변화되었다고, 은혜받았다고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삶이 바뀐 것입니다. 진정한 회개란 바로 삶의 태도가 바뀌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진정으로, 진실되게 회개하는 사람만에게만 주어 지는 것입니다. 지나가는 말로 회개했다고 해서 회개가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더더욱 구원 주어지지 않습니다. 정말 간절하게 주님께 매달리면서 자신의 죄를 자복하고 다시는 과거와 같은 삶을 살지 않겠노라고 발버둥치며, 몸서리치며 그 현장에서 돌아설 때에 진정한 회개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회개가 있은 후 진정한 구원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자인지 아닌지는 우리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을 살펴 보면 되기 때문입니다. 정말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회개를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를 확인해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구원을 받기 위해서 진정으로 회개하셨습니까?
오늘 누가복음 19장 9절에서 회개한 자에게 선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진정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시는 성도님들 다 되시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회개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를 위해서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9장 10절 말씀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2017년도 주님의 오심을 기대하는 대강절을 맞이하면서 아직까지도 내 자신의 죄를 회개하지 못하고 구원받지 못한 성도님들이 여기 계신다면 이 시간 주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나가시기 바랍니다. 각자의 죄를 자복하고 정말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당장 죽는다할지라도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의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만 천국문을 열 수가 있습니다. 실컷 천국문 앞까지 가서 그 문이 내게 열려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갈 수 있는 곳은 오직 한 곳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자에게는 우리 주님이 천국을 활짝 열어놓고 기다리십니다.
주님이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 그 분을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의 자리에 회개함으로 나아가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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