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8:18-25)
오늘은 사순절 세번째 주일을 맞는 날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사순절의 의미를 생각하고 기념하면서 지내고 계십니까? 오늘은 사순절 기간동안 생각해 보아야 할 성도의 삶은 어떤 것인가 그 두번째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요즘 만나는 사람들마다 ‘살맛납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보다 ‘힘들어 죽겠다’, ‘어려워 죽겠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저도 때로는 힘든데 누구 한분 이라도 ‘살맛납니다’라고 말해 주시는 분이 있을 때 굉장이 힘이 납니다. 힘들어도 ‘살맛나는 인생’을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가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예전같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도들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난의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지난 주 우리는 우리의 신분이 하나님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임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복받을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선행을 하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선을 행하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까? 내 이웃을 돌아볼 줄 아는 자를 말합니다. 나 혼자만 괜찮으면 된다가 아니라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내 이웃에게 위로가 되어 주는 것 그것이 선을 행하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실 때에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자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은 기쁘시게 받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있습니다. 바로 아담의 아들들, 즉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드린 제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요약하자면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이 드린 제사는 받으심을 통해 일어난 인류 첫 살인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가인의 제사를 보고 이런 저런 말을 많이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을 가지고 가인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이나 제사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말들 합니다. 그러나 사실 창세기 4장의 이야기를 자세히 쳐다보면 그게 아닙니다.
인류사회학에서 가르치는 내용가운데 인간이 처음으로 한 노동은 사냥과 같은 수렵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신석기 시대에 와서야 농업이 정착되기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인류발달은 사냥과 같은 수렵이 이루어지기 전부터 농업이 먼저 이루어졌다고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고기를 음식으로 주신 것이 언제부터인지 아십니까? 창세기 1장 29-30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인간에게 주신 음식은 무엇이었습니까? 씨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맺는 모든 나무(열매)입니다. 심지어 이것들은 동물들에게도 먹이감으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우리에게 동물을 음식으로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셨습니까? 창세기 9장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식물로는 인간의 음식으로 다 대처할 수 없었을 때부터입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4장에 나와 있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를 보면서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해야 합니다. 왜 아벨은 먹지도 못하는 짐승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가입니다. 혹시 짐승으로밖에는 드릴 수없는 어떤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생각하기에 원래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는 짐승으로 드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출애굽한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진 제사법에서 나온 우리의 고정관념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 일반적으로 짐승제사를 드리기 시작한 것은 노아홍수 이후부터이다라는 것이 성경학자들의 견해입니다.
고대 문서들을 연구해 보면 농경사회에서 발달된 제사형식은 짐승제사가 아닌 곡물이나 열매를 신들에게 바친 흔적들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가인이 살던 이 지역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풍부한 곡식을 자랑하는 농업이 발달된 지역이었습니다. 근데 왜 하필 아벨은 농업이 아닌 목축을 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그가 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장자인 가인에게 그의 주업이 농사일을 물려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태어난 아벨에게는 집안의 농사일이 아닌, 다른 일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목축일입니다.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거나 천막을 만드는 그런 일을 하게 한 것인지 모릅니다.
그렇다보니 아벨은 짐승의 가죽으로 형이 생산한 곡식을 사서 먹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는 곡식이 물물교환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시대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아벨이 먹지도 못하는 짐승으로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아벨이 곡식을 얻을 수 없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 한 예로 노아도 짐승으로밖에 제사를 드릴 수 없었음을 창세기 8장 20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창세기 4장에서 처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사를 딱 드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전에도 가인과 아벨이 각각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 받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이유를 창세기 4장 7절에서 말합니다. 함께 보시겠습니다.
뭐라 그럽니까? 선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선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아벨이 먹지도 못하는 짐승으로 제사를 드릴 수밖에 없었던 그 환경을 생각해 봐야 합니다. 뭡니까? 동생에게 먹을 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쌀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가인이 선을 행하지 않았다는 것은 바로 동생 아벨의 배고픔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14장에 가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28-29절)
여러분 복받는 비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간단합니다.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나눠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십니다. 어떻게 선을 행하면 됩니까? 간단합니다. 소득의 십의 일을 다들 내시면 됩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교회는 선교와 구제와 장학사역에 열심으로 쓰고 봉사하면 하나님께서는 십의 일을 낸 성도들에게 복을 배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선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룻기 4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룻기 4장에는 보아스의 이름은 기록되고 원래 기업을 무를 자는 이름도 적혀 있지 않습니다. 선을 행하는 자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입니다.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한보아스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오게 되는 조상이 되는 복을 받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을 행하는 자의 복입니다. 왜 우리가 선을 행해야 하는지 이제 이해 하시겠습니까?
룻기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입니다만, 룻기 이야기를 볼때마다 화가 치밀어 오는 것이 있습니다. 룻기 1:14절의 말씀입니다.
또 선을 행한 자는 마태복음 25장 34절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말입니다. 즉 선을 행하는 성도는 하늘 나라의 상속자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다시 말해 오늘 로마서 8장 1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습니다. 함께 로마서 8장 17절을 찾겠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을 존재라는 것입니다. 근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기업을 받을 자들이 하나님의 영광스런 기업을 받기 위해 이 땅에서 또 받아야 하는 것이 하나 더 있다고 말합니다. 무엇입니까? 고난이라고 말합니다.
필립 얀시라는 기독교 저술가가 있습니다. 그 분이 쓴 책 가운데 이런 책이 있습니다. “Where is God when it hurts”, “내가 고통 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라는 책입니다. 이 책의 내용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선물”. 선물은 선물인데 원하지 않는 선물이랍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우리가 받는 고난을 이 저자는 선물이라는 말합니다.
고난이나, 고통, 환란, 괴로움, 아픔, 어려움 등등 이런 것은 예외 없이 모두에게 있습니다. 남녀노소할 것없이 누구나에게 말입니다. 이러한 고난과 아픔들은 어느 누구도 대신해서 당해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고통을 당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또한 고통이나 고난의 종류도 여러 가지입니다. 마음의 상처나 아픔이 있습니다. 정신적인 괴로움도 있습니다. 영적인 고통도 있습니다. 육신적인 고통이나 고난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당하는 고통이나 고난에는 우리의 잘못이 아닌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당하는 대부분의 고난은 우리의 부주의나 사고, 실수, 끊지 못하는 나쁜 습관이나 저지르는 죄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러나 때때로 우리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마주치게 되는 고난도 있습니다.
구약의 욥이 당한 고난이 그런 것이었습니다. 욥의 고난은 아주 컸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은 욥이 전혀 기대하거나 바라거나 예비하지 못했습니다. 요셉이 당한 고난도 있습니다. 17세에 종으로 팔려가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또한 어떤 고난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믿음 때문에 성도들이 겪는 고난입니다. 믿음의 길이 아니었으면 당하지 않을 고난이나 고통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다는 것 때문에 당해야 하는 고난과 고통, 참음과 인내라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당할 수밖에 없었던 고난들이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만으로 그들이 당하는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핍박과 환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11장 35-40절 말씀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을 이렇게 증거합니다. 이 말씀을 보고 여기 계시는 성도님들께서는 도전을 좀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35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36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37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39 이 사람들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40 이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더 좋은 것을 예비하셨은즉 우리가 아니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이 당한 고통이나 고난은 아주 많고 컸었습니다. 바울 만큼 많은 고난을 당한 사람도 없습니다. 고린도 후서는 바울이 당한 고난들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고후 1:8-9)
“…환난과 궁핍과 곤난과 매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Riots)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고후6:4-5)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하였으며…”(고후 11:23-27)
이러한 바울이 로마에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을 향하여 말합니다. 당시 로마황제로부터 유대인들로부터, 이유없이 고통당하는 성도들에게 고난은 바로 우리 성도가 하나님 나라의 상속받기 위해 받는 당연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성도라면 당연히 선을 행하며 살아야 하는 것처럼 성도들에게 오는 고난도 당연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고난과 고통을 만나더라도 놀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성도들이 만나는 어려움과 고난, 고통은 앞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받을 영광과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18절을 보겠습니다. “생각건데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이 말씀은 장차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우리가 누리게 될 영광, 예수님과 함께 왕노릇하며 살 그 날의 영광을 이야기도 하지만, 또한 지금 당하고 있는 고난이후 반드시 성취될 우리의 기도제목에 대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고난 당한다고 생각들면 참아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피조물들도 참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참아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 22절의 말씀입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우리만 힘들고 어렵고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무슨 피조물들이 고통을 느끼는가라고 생각하시겠지만, 느낀답니다.
1968년 미국에 백스터(FBI)라는 학자가 논문을 발표: 거짓말 탐지기 계발참여자
- 그가 발견한 것: 화초가 감정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
- ‘난’을 키우는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 자식처럼 사랑해 줄 때, 살고 꽃을 피운다고 함
참고 기다리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말입니다. 비록 지금 내 일이 잘 안 풀린다고 어렵다고, 다음 달 Payment 때문에 괴롭다고 울지 말고, 하나님의 놀라우신 영광을 믿음으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25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But if we hope for what we do not yet have)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뭔 소립니까? 우리가 지금 기도하고 있는 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참음으로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나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고통스러워도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말씀대로 이루시면 지금 겪은 고통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영광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사랑하는 성도님들께서 겪고 계시는 고통과 고난이 어떤 것입니까? 만약 너무 힘들다고 생각되는 그런 상황속에서 계신다면 한번 더 참음으로 기다려 보시길 바랍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기적을 보게 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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