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여인의 믿음
(마태복음 15:21~28)
한국의 지체부자유자 기독시인이 있습니다. 송명희 시인입니다. 이 송명희 시인이 쓴 시에 찬양사역자로 한 때, 한국에서 선풍적인 바람을 일으켰던 최덕신씨가 곡을 붙인 ‘그 이름’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제가 한번 불러보겠습니다.
뜬금없이 이 찬양을 왜 불렀는가 의아해 하실 분들이 있을 줄 압니다. 오늘 제가 이 찬양을 부른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설교의 중요한 내용이 이 찬양가사에 다 담겨져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늘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기를 여인의 믿음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를 합니다. 또한 우리도 그렇게 알고 있고, 그렇게 들어 왔고 그렇게 이야기해 왔습니다. 물론 이것이 틀린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설교를 오늘 본문의 진정한 메세지인냥 착각하게 되면 우리가 가진 기독교 신앙에 치명적인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가지고 만약 여인의 믿음에 대한 내용으로 설교를 하게 되면 이 설교가 끝난 후 우리는 또 다시 이 여인의 믿음과 같은 믿음을 지니기 위해 수고와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여인이 응답받은 것처럼 우리는 교회에서 철야를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목이 터져라 나의 기도제목을 하나님께 쏟아 내어야 합니다. 또한 이렇게 설교를 하게 되면 설교자도 쉽고, 듣는 성도님들도 너무 쉽습니다. 왜냐하면 고민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제가 늘 말씀을 드리지만, 기독교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예수를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이 교회당에 들어와 있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일날 한번 교회에 나와서 예배하고 헌금하고, 친교하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 적당히 봉사하고, 적당히 세상에 한발, 교회에 한발 걸치고 산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음 있는 것같은 착각속에서 열심으로 산다고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한 앎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과 똑같은 내용이 나오는 마가복음 7장에 가면 거기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여자는 그리스 사람으로서 시로페니키아 출생인데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간청하였다.”
마가복음에 의하면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달라고 찾아온 여인은 유대인이 아니라, 그리스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유대인들이 인간 취급도 하지 않던 이방인입니다. 더욱이 당시 사회분위기상 이방남자도 아닌, 이방여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이방 여자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자신의 딸을 고쳐달고 외칩니다.
이 여인은 이방인입니다. 이방인 중에서도 가나안 사람입니다. 마태는 이 여자가 가나안 여자라고 합니다. 신명기서에 의하면 가나안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멸절되어져야 하는 민족입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또한 가나안 사람 중에서도 남자도 아닌, 여자입니다, 여자 중에서도 그 딸이 귀신들린 사람, 누가 봐도 도저히 선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또한 이 여인이 가진 상황은 자신이 선택한 상황이 아닙니다. 가나안 사람이라는 것도, 여자라는 것도, 귀신 들렸다는 것도 자기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인생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 떨어진, 그러고도 어디 가서 해 볼 수 있는 일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런 여인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그녀는 지금 절망의 나락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예수라는 사람이 자기 동네에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예수는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입니다. 온갖 병자들을 다 고쳐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차별하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도 가리지 않고 다 고쳐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돈을 받는 것도 아니고, 무슨 조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찾아가서 고쳐달라고 요구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다 고쳐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예수라는 분이 자기 동네에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찾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기회가 도무지 다시 올 리가 없으니 찾아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물불 가리지 않고, 부끄러움도 무릅쓰고 예수께로 나갔습니다.
어느 날, 경찰과 소방관이 싸웠습니다. 근데, 소방관이 경찰관을 이겼습니다. 그 이유가 경찰관은 조목조목 뭐가 옳고 그른지에 대해 따져가며 싸웠다고 합니다. 하지만 소방관은 물불 안가리고 싸웠기 때문에 소방관이 이겼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방관이 얼마뒤 장님하고 싸웠다고 합니다. 근데 장님이 이겼습니다. 그 이유가 이 장님은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장님이 이겼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후 이 장님이 한 노인을 만나서 그 노인이랑 싸웠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노인이 그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왠만큼 살만큼 살았으니, 아쉬울 것이 없다고 죽기 살기로 싸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인이 승리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여인에게도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예수님께 나아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계신 자리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22절의 말씀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쉽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다음 행동을 말입니다. 주님께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차별하실 리가 없고, 또 굳이 가나안 여인이라고 해서 그 청을 물리치실 리도 없습니다. 그분은 누구라도, 아니 그렇게 어려움에 빠진 사람일수록 더 따뜻하게 품어주시고 고쳐주시던 분이 아니십니까? 그러니 금방 그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23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예수께서 왜 그러셨는지 어디에도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예수는 침묵하셨고, 침묵하시는 예수님을 향해 그 여인은 계속 도와달라고 소리쳤을 것입니다. 그래서 듣다 듣다못해 제자들이 주님께 간청했습니다.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안심시켜서 떠나보내 주십시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 대충 빨리 고쳐주셔서 이 소란을 끝내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또 다시 뜻밖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24절의 말씀입니다.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예수님의 입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이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 곧 유대인들만을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틀린 말씀은 아닌데, 우리가 상상하고 있던 예수님의 평소 말씀이 아닙니다. 그래서 납득이 안 됩니다.
이정도면 돌아서야 합니다. 화가 나서, 열받아서 돌아서야만 하는 것이 정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오히려 예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간청했습니다. 25절입니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이제는 예수님께서 그녀의 간구를 들어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렇게까지 무릎을 꿇고 간청하는데 그것을 내치실 주님이 아니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에 대고 직접적으로 한 마디 덧붙이셨습니다. 26절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한 마디로 너는 개다라는 것입니다. 구원받을 자격도, 구원받을 존재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쯤되면 모든 것이 끝난 것입니다. 사생결단낼 상황입니다. 이제는 진짜, 예수님게 악담을 퍼붓고 돌아갈 때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놀라운 대답을 합니다. 27절입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 가면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인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자가 먹는 잔치상 아래서 거지가 부스러기를 먹었습니다. 이 부스러기가 어떤 것이냐하면, 유대인들은 고기든 빵이든 손으로 집어먹는 풍습입니다. 고기를 손으로 집어먹으면 손에 기름기가 묻습니다. 그 때, 그 기름기를 닦는 것이 바로 빵입니다. 근데 빵으로 손을 닦을 때, 부스러기가 나옵니다. 이것을 나사로는 주워 먹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그 빵부스러기는 원래 개나 핥아먹던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누가복음에 나오는 나사로는 빵부스러기를 개처럼 혓바닥으로 핥아먹었는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인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빵스러기라도 좋으니, 제가 핥아먹겠습니다. 제게 주십시오.’ 무슨 말입니까?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나를 개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제 딸을고쳐만 주십시오.”
이방인 여인이요 동시에 어머니였던 그녀는 구원을 유대인들에게만 베푸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지당한 말씀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주는 구원의 부스러기라도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내 딸을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그녀의 믿음을 보시고 그녀의 간청을 들어주셨습니다. 28절의 말씀입니다.
“여자여, 참으로 네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
그리고 마태는 바로 그 시각에 그 여자의 딸이 나았다고 증거합니다.
마태복음 전체를 읽어보시면 이 여인과 같이 믿음이 크다고 칭찬받은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오직 한 군데 더 나오는데 바로 이방인 백부장입니다. 마태복음 8장 10절에 보면 나옵니다. “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이 두 사람 다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몇 가지 의문을 갖게 됩니다. 도대체 왜 오늘의 본문은 예수님을 이렇게도 편협하고, 냉정한 인물처럼 그리고 있을까, 이왕 고쳐줄 것, 화끈하게 고쳐주지 그렇게 속을 태우고 마지막에 가서 고쳐주는 것은 무엇인가, 흔히 이 본문을 갖고 설교하는 것처럼 그녀의 믿음을 테스트해 보기 위함인가라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여인의 믿음에 초점 맞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여인이 대표하는 이방인들이 구원받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은 마태복음 12장 21절에도 나오는바 “이방 사람들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는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12장 17절부터 21절을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18 보라 내가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내가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19 그는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21 또한 이방들이 그의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방 사람들이 그 이름, 예수의 이름에 희망을 걸 것이라고 말합니다. 저와 여러분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이방인인 우리에게 희망이 생긴 것입니다. 구원받을 수 없고, 우리의 죄값으로 그저 죽을 수밖에 없는 이들에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이 성취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지만, 마가복음에 없는 것이 22절의 말씀가운데, 이 여인이 예수님을 보고 부르짖은 말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이름을 부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에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에 희망을 가지면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교회를 다닌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이 교회 봉사를 다른 사람보다 더 잘 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이 내가 어떻게 믿었는지 자랑한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의 본문이 단순히 그 가나안 여인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오늘 마태는 가나안 여인을 통해 정확하게 우리의 구원이 어디로부터 오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가지고 절대 여인의 믿음을 운운하면서 설교하거나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구원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우리도 가나안 여인과 같은 이방인이었습니다. 우리도 이 여인처럼 결코 유대인이 될 수 없는,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일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돌아보면 그녀처럼 절망에 빠져 죽어갈 때가 너무나 많은 존재이었고, 일 것입니다. 그 여인처럼 더 이상 어디 기대볼 데가 없는 상황에 처할 때가 우리에게도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세상적으로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도, 모든 것이 다 우리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오직 예수, 그 이름에 희망을 거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에 소망을 둘 때,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어지는 것입니다. 교회 마당을 밟을 때,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오래 교회를 다녔으니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문제의 해결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에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의 유일한 희망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교회의 유일한 희망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에 능력이 있습니다. 그분의 이름을 의지하여 기도할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 분의 이름을 의지하여 간구할 때,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자녀가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내 사업장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내 건강이 회복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에 비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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