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회개란 무엇인가?
(에스라 10장 1-12절)
오늘 본문은 해석하기도, 그렇다고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부분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방금 전 읽었던 본문과 같이 언뜻 보기에는 에스라의 회개와 영적 각성 방법이 너무 과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7장 1-5절 말씀에 의하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얻을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있는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붙여 너로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그들과 무슨 언약도 말 것이요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 것이며
3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찌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것은
4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5 오직 너희가 그들에게 행할 것은 이러하니 그들의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목상을 찍으며 조각한 우상들을 불사를 것이니라
3절에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들과 혼인하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어쩜 에스라와 포로귀환한 유다공동체는 이 신명기 말씀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인지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방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것이 율법에 위배되고 잘못되었다손 치더라도, 이미 결혼해서 살고 있는, 더욱이 자녀까지 낳아 살고 있는 부부를 갈라놓고, 그것도 모자라 유다사회로부터 내치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어지느냐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들이 고대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쉽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늘 날 성경을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 본문의 에스라가 행한 방식이 납득이 되어지느냐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 이야기 속에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 가운데, 이방여인과 결혼을 한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의 총회에 들어올 수도 없는 이방 여인이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 있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요셉을 기억하십니까?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말고,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말입니다. 요셉의 아내가 누구입니까? 이집트 온 제사장의 딸입니다. 이방신의 제사장의 딸과 결혼한 요셉, 하나님은 요셉에게 죄를 물으셨습니까?
모세는 어떻습니까? 이집트를 나온 뒤, 구스 즉 지금의 에티오피아 출신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설명: 아론과 미라암의 비난)
오히려 하나님은 모세의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헷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아내로 맞이하여 솔로몬이라는 지혜의 왕을 낳게 됩니다. 심지어 다윗의 증조할머니인 룻의 출신은 어디입니까? 이스라엘의 총회에 들어올 수 없는 모압출신의 여인입니다.
이들이 이방 사람을 아내로 취했다고 해서, 혹은 이방사람이라고 해서 잘못된 것이냐라는 겁니다. 성경은 결코 그들이 이방 사람들과 결혼을 했다고 해서 그들이 이방사람이라고 해서 그것이 죄라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라고 판단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에스라 10장에서, 물론 9장부터 시작되는 포로귀환 후 유다공동체에 일어난 이방여인과 결혼이 무엇이 문제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죄가 무엇이며 믿는자로서 죄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 살펴 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에스라 10장의 배경을 간략하게 언급하면 이렇습니다. 남유대 백성들이 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끌려간 후 70년만에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포로로 끌려갈 때처럼, 포로귀환할 때도 1차 2차 3차로 나누어서 포로귀환을 하게 됩니다.
1차 포로귀환한 이들이 제일 먼저 했던 일이 무엇입니까? ‘성전’을 다시 건축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의 건축 횟수 간략하게 소개)
여하튼 우여곡절 끝에 1차 포로로 귀환한 후 20년이 지나서야 성전을 완공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한 참을 지납니다. 2차 포로귀환이 있게 되는데, 이 때 2차 포로귀환을 이끈 사람이 우리가 읽고 있는 에스라서를 쓴 에스라입니다. ‘애’ 많이 쓴 사람입니다.
에스라가 2차 포로귀환하여 한 첫 번째 일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면 1차 포로귀환 후 예루살렘 지역에 살고 있는 유다 사람들의 성전제사, 즉 예배를 다시 확립하고, 이들의 경제적, 신앙적 삶을 면밀히 살펴 보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에스라가 유다사람들의 신앙적인 면을 살펴 보는 가운데 생각지도 않은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그 문제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9장 1-2절의 말씀을 찾아 보겠습니다.
에스라 9장 1-2절 말씀 교독
방금 읽었던 9장 1-2절에서 나타난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물론 일차적으로는 이방사람들과의 결혼이 문제로 제기 되었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1절 마지막과 2절의 마지막 부분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먼저 1절 마지막 부분에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역겨운 일을 따라서 합니다”
지금 유다공동체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제가 뭐라고 합니까? 이방인들과의 결혼을 통해 유다백성들에 일어난 일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유다 백성들이 지금 역겨운 일을 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유다 백성들이 이방 사람들을 따라 역겨운 일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포로에서 귀환한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이방인과의 결혼이 뭐 대수겠는가라고, 뭐 그리 큰 문제를 일으키겠는가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결국 그 일이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역겨운 죄를 짓게 하는 엄청난 결과를 가져 오게 됩니다.
죄가 이런 것입니다. 처음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위장해서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하지만 그 죄를 건드리는 순간 우리 자신도 모르게 그 죄의 역겨운 일에 익숙해져 버리고 나중에는 그것이 죄인지도 인식하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죄를 저질러 놓고도 당당해져 버리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혹여 우리 가운데서도 이런 죄를 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쩌면 죄를 죄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까지 빠져 있는 경우는 없으십니까?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유다 백성들은 포로귀환 후 너무나도 어이없이, 쉽게 이방인들과 결혼하고 역겨운 일을 하게 된 것이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들이 쉽게 죄악에 물들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유대공동체를 다시 회복시키신 그 이유, 즉 유다 공동체의 사명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9장 4-6절의 말씀을 함께 찾아 보겠습니다.
4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명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6절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보시기 바랍니다.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명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백성이 되어 살아내는 것이 그들의 사명입니다. 왜요? 세상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거룩성을 통해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구원해 내시고 하나님의 선민으로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야 하는 사명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핏값으로 구원하셨다고 생각하십니까? 마태복음 5장 16절에서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한 번 찾아 보겠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착한 행실, 좋은 행실, 선한 일들을 솔선수범함으로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 우리가 구원받은 이유이며 오늘을 사는 우리의 사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심지어, 에스라 9장 2절 마지막부분에서 말씀하듯이 좋은 일을 고사하고 역겨운 일에 앞장서서 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에스라 10장에서 유대공동체의 죄는 근본적으로 이방인들과 통혼한 문제보다 이방인들과의 결혼을 통해 발생된 추악한 죄가 더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상황적으로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우리의 인생사에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걸 부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창세기 41장 50절에서 요셉은 당시 이집트의 온 제사장의 딸 보디베라를 아내로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요셉의 입장으로서는 보디베라를 이집트 사람이라고 해서 죄악시 할 이유가 없었던 상황입니다. 더욱이 고대사회에서 왕이 신하에게 짝을 지어 주는 것은 왕의 권한이자 축복중에 하나입니다.
출애굽기 12장 1절에서 모세는 구스 여자를 아내로 맞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방사람을 아내로 맞이했다고 해서 벌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구스여인의 사랑이 하나님을 감동시켰기 때문입니다. 모압여인 룻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의 아내 밧세바 역시 상황적으로 똑 같은 경우입니다.
하지만, 포로귀환한 유대공동체가 저지른 죄는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다시 부르시고 그들에게 주신 사명을 잊고 오직 자신들의 쾌락을 위해 유다공동체의 순수성과 거룩을 버린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신태규 목사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우리가 오히려 세상의 가치관을 하나 하나 교회 안으로, 주섬주섬 들어옴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켜야 될 우리가 오히려 교회를 변질시킨 꼴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유익과 이익을 위해 세상의 가치관을 교회 안으로 끌고 들어 오는 것, 세상의 가치관을 우리의 신앙 안으로 끌어 들이는 것, 교회의 거룩성을 변질시키는 것, 이것이 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죄를 저지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런 죄를 저지르는데 앞장서고 있지는 않습니까? 에스라 9장 2절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도자와 관리라는 자들이 오히려 이러한 일에 앞장을 섭니다.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영적 리더쉽들 가운데 오히려 이런 일에 앞장을 서는 일들이 있다고 말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영적 민감성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영적 민감성을 잃어 버리니 오히려 죄를 짓는 일에 앞장 서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믿는 자들은 신앙생활할 때 반드시 영적 민감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삶의 작은 부분에서도 영적으로 깨어서 죄를 멀리하고자 발버둥쳐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죄에 대한 영적 민감성을 갖게 되는 것입니까? 에스라 9장 3절의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에스라 9장 3절 말씀 강해
죄에 대한 영적 민감성을 갖기 위해서는 날마다 우리에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회개의 삶입니다. 에스라 9장 3절 말씀에서 에스라는 어떻게 했다고 말합니까?
“옷을 찢고, 머리카락과 수염을 뜯었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게 쉬워 보이십니까? (부연설명)
회개란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영적 민감성을 갖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회개는 죄를 그냥 가볍게 뉘우치고 후회하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 조목조목 주님 앞에 아뢰며 철저하게 통곡하고 자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육체적 고통을 느끼듯이 우리 영혼의 통증을 느낄 수 있도록 회개를 해야 합니다. 이런 회개가 아니면 우리는 헛된 회개를 한 것이 됩니다. 이런 회개를 하지 않으면 또 다시 죄의 반복성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회개란 쉽지 않습니다. 힘듭니다. 하다가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럴 때, 누군가가 옆에서 함께 힘을 준다면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10장 2-4절의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에스라 10장 2-4절 교독
지금 마음에 통증을 느끼며 처절한 회개에 빠져 있는 에스라에게 누가 다가옵니까? 스가냐입니다. 그리고 이 스가냐가 에스라에게 용기를 줍니다. 포기하지 말라고, 끝까지 힘내어서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라고 격려를 합니다. 좌절해 있는 에스라에게 힘을 줍니다. 회개할 때 위로가 임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스가냐를 보면서 우리의 위로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됩니다. 죄 때문에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좌절하고 있는 자들에게 오늘 우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찌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찌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이사야 1장 18절)
진정으로 가슴을 치며 통회하고 자복하고 회개하는 자들에게 우리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힘내라, 염려하지 마라, 회개하고 다시는 반복적인 죄를 짓지 않도록 용기 있게 일어나서 나아가라, 내가 도와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회개하는 자들에게 함께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란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이 주신 사명을 잊고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세상 가치관대로 사는 것, 그래서 어느 순간 그것이 죄인지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그래서 그 죄를 지적하면 불평과 불만의 소리를 내는 것, 더 심각한 것은 교회 생활을 하면서 영적 민감성을 잃어 버린 그 자체가 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정직성입니다. 영적 민감성입니다. 정직성과 영적 민감성이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정직성과 영적 민감성이 회복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날마다 우리의 죄를 회개하는 신앙이 회복해야 합니다. 회개의 운동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영적 민감성과 정직성이 회복될 수 없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 교회의 부흥이 있을 수 없습니다.
회개할 때, 정직성과 영적 민감성이 회복되고 영적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자에게 우리 주님은 위로가 되시며 힘을 주시며 십자가의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회개할 때, 우리 주님의 언약의 말씀 안에서 우리의 삶이 안전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에스라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과 우리교회가 회복시켜야 될 것, 회개와 영적 민감성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