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와 기다림 (룻기 3장 6-13절)
연령대에 따른 부부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쓴 글이 있어서 소개하고자 합니다.
20대에는 행복의 꿈에 부풀어서 신이 나서 살고
30대에는 서로에 대해 실망을 느끼며 환멸을 참으며 살고
40대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지못해 체념하며 살고
50대에는 서로 없어서는 안 되니까 의지하는 마음으로 살고
60대에는 서로 안 됐다 생각되어 가엾어서 살고
70대에는 지금까지 참고 살아준 것만 해도 고마워서 산다.
이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이 저희 어머님께서 예전에 하셨던 말씀을 떠 올리면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어머님도 제가 어렸을 때, 한번씩 아버지를 한탄하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어머니께 저희에게 늘 말씀하셨던 것이 ‘너의 아버지 불쌍하지 않냐”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성도 이름도 다르고 나랑 피 한방울조차 썩이지 않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만나 부부라는 인연을 맺고 살아간다는 것은 기적중에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부부의 인연을 설명할 때 이런 설명을 합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이생에서 옷깃을 한번 스치기 위해서는 전생에 큰 바위에 물방울이 한방울씩 떨어져 그 큰 바위가 다 닳아 없어지는 시간이 흘러야 이생에서 옷깃 한번 스치는 인연이 된다고 합니다. 그러니 부부의 인연을 맺고 사는 것이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러서 만나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옆에 있는 분들에게 한번 인사하겠습니다. “오랫동안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지겨워 죽을 뻔 했습니다.”) 비록 불교의 진리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부부의 인연의 소중함을 깊이 성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성경 창세기 2:24는 부부가 된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이 구절에서의 세 개의 중요 동사가 있습니다. "떠나다". “합하다". "한 몸을 이루다"가 이 3가지입니다.
"떠난다"라는 것은 부모로부터의 분리를 포함하며 남편과 아내로서의 합법적 결합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것은 새로운 시작과 새로운 출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된다는 것, 결혼을 한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내 삶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작과 출발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합한다"는 것은 딱 들어 붙어 하나가 된다는 의미의 히브리어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종이 두 장을 풀로 붙여 놓은 것이나 같습니다. 하나로 붙여 놓은 종이를 나누려고 한다면 이 둘을 다 찢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부는 서로 사랑하고 가까워지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와 같은 합함이 없다면 그들은 합법적으로 결혼생활을 할지는 모르나 사랑이 없는 '공허한 결혼생활'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입니다.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육체적인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두 사람이 각자의 육체나 소유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고와 감정, 기쁨과 고통, 희망과 두려움, 성공과 실패도 함께 나눈다는 것을 말합니다. 두 인격이 짓눌러지고 말살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나라 한 인격의 독특성이 유지되면서 완전한 관계를 이루기 위하여 배우자의 인격의 독특성을 인정하며 상대와 함께 결합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부가 한 몸을 이루는 이런 관계가 부족할 경우, 그 부부는 만족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된다는 것은 결혼이라는 법적 절차를 밟는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자연적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시간 서로가 서로를 신뢰하고 참아주고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사랑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도 사랑하려고 노력할 때 진정한 부부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부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또한 남녀 각자가, 아내와 남편이 갖추어야 할 모습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룻과 보아스의 관계속에서 진정한 부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아내로서 남편으로서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진정한 부부의 삶이 어떤 삶이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길 소원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의 룻의 모습속에서 우리는 아내로서의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순종의 모습을 지닌 것입니다(3:1-5).
아내로서의 가장 큰 덕목이 무엇이겠습니까? 순종의 모습입니다. 오늘 룻은 순종적인 여자였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먼저 앞서기 보다 시어머니의 말씀을 겸허히 따를 줄 아는 여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룻의 이 순종적인 자세가 저주받은 이방여인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거룩한 족보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22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또한 골로새서 3:18에서도 말합니다.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성경은 아내들의 순종적인 자세가 어떤 특별한 것이 아니라 마땅한 자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내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남편들에게 복종함이 마땅한 것, 당연한 것이라고 믿으십니까?
2. 아내로서의 아름다운 모습은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반듯함이 있는 모습입니다(9).
오늘 롯은 자신의 기업을 무를 보아스에게 당당히 자신의 의무를 다하라고 말합니다. 아내로서 남편들이 자신의 일을 잘 감당하지 못하거나 잘못된 길을 갈 때, 바른 소리를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수도원에 있던 3명의 수녀들과 함께 수도원을 나왔습니다. 3명 중의 수녀 가운데 2명은 얼굴이 이쁘고 마음씨도 고와서 시집을 보냈습니다. 근데, 유독 남은 한명은 얼굴도 그렇게 이쁘지도 못하고 성격도 별로 좋지 못했습니다. 몇번이나 시집을 보내보려고 했던 마틴 루터의 노력이 허사가 되자, 하는 수 없이 마틴 루터의 아내로 맞아 들였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종교개혁이 한창일 때, 로마교황청으로부터의 핍박이 심해지자 그 두려움에 떨려 그만 중도에 포기해 버리고 맙니다. 그런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침상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마틴 루터의 아내가 하얀 소복을 입고 들어와서 루터의 침상에서 곡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루터가 아내를 만류하자 마틴루터의 아내는 이렇게 말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죽었습니다.” 이 아내의 말을 듣고 마틴 루터는 새로운 용기를 얻어 종교개혁의 중심에 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내들이여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은 남편에게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반듯함이 있습니까? 가끔 아내는 남편에게 ‘야당’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잊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3. 자신의 유익을 먼저 생각지 않는 모습입니다(10).
룻은 자신의 유익과 쾌락을 쫓기 보다 가정과 가족을 먼저 생각하는 여인이었습니다. 10절 후반부의 “네가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의 의미가 무슨 의미인 줄 아십니까?
- 시모를 섬기는 것 보다도 지금 자신이 가정과 나오미의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자 하는 것이 더 크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현숙한 여인이 누구를 현숙한 여인이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바로 자기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여인을 말합니다.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잠언 31장 10절을 찾아 보겠습니다.
오늘 아내들에게 부탁드립니다. 순종적인 모습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남편의 잘못을 지혜롭게 말할 줄 아는 반듯함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현숙한 여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제 끝으로 남편들이 갖추어야 할 모습을 오늘 본문의 보아스에게서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성급하지 않았습니다(13).
보아스는 룻을 아내로 삼기 위해 성급해 하지 않았습니다. 매우 신중에 신중을 기함을 보게 됩니다.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절제되고 신중한 모습을 가지는 것입니다. 여자들은 남자의 신중한 일처리를 보면서 신뢰를 하게 되고 그 사람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게 된다고 합니다. 만약 이러한 신뢰가 깨어지면 여자의 마음은 쉽게 돌아서지 않는다고 합니다.
2. 보아스는 따뜻한 배려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14-15).
오늘 본문의 보아스는 룻의 형편과 처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최대한 룻이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신경을 썼습니다. 또한 룻이 봉양해야 할 시모의 먹을 것을 챙기는 일까지도 잊지 않았습니다. 보아의 사려깊은 배려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이 보아스의 모습을 보면서 남편들이 아내에 대해서 가져야 할 가장 큰 덕목을 봅니다. 배려입니다. 남편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아내들을 깊이 배려하고 계십니까? 누구보다도 아내들이 힘들거나 어려움을 빠지지 않도록 여러가지 일들을 살피고 아내를 지켜주고 계십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못난 남편이 누군 줄 아십니까? 아내를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내가 곤경에 처해서 발을 동동 굴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희열을 느끼는 남자입니다. 이런 사람들 의외로 많습니다. 부부싸움 했다고 해서 상대방의 어려운 처지와 약점을 잡아서 계속 곤란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처가에 볼일 있어서 가다가 그 길에서 싸웠다고 해서 남편된 자가 처가에 안간다고 버팅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내가 자신에게 빨리 가자고 애달아 하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즐기는 남편이 있습니다. 정말 못난 사람입니다. 남편들은 무엇보다도 누구보다도 아내를 배려하는 것이 우선이어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남편들은 옆에 있는 아내들에게 한번 말하겠습니다. “당신을 제일 먼저 배려하겠습니다.”
3. 마지막 세번째, 보아스는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4:1-7).
보아스는 자신보다 먼저 앞서 기업무를 자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차례가 될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대기만성형의 사람인 것입니다. 기다림의 시간과 기다리는 동안 마음 졸임이 없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남편된 우리들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우리의 사업장이,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반드시 잘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진득히 인내하고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럴 때 아내들은 남편에 대한 신뢰가 높이 쌓이게 되는 것이며 이런 남편을 군소리없이 순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부부의 인연을 맺어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내가 만난 나의 아내와 남편은 신비중의 신비이며 기적중에 기적입니다. 지금 지구상의 60억이상의 사람들 중에 만난, 60억분의 1의 경쟁률을 뚫고 만난 존귀하고 존귀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 존재가치를 깨닫지 못할 뻔 한 일입니다. 이런 귀한 우리의 반쪽에게 당신은 지금 무슨 말씀을 제일 하고 싶으십니까?
옆에 앉아 있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고백하겠습니다. “당신을 정말 사랑합니다. 내가 다시 태어나도 당신을 반드시 찾겠습니다. 살아줘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