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상 22:9-20(악이 선을 이길 때)
악이 선을 이길 때
(삼상 22장 9-20절)
모순과 역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순이라는 말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논리의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모순이라는 말의 유래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것을 뚫을 수 있는 창과 모든 것을 막을 수 있는 방패, 이 둘이 대결을 한다면 과연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에서 나온 말이 모순이라는 말입니다. 즉, 논리상, 이치상 맞지 않는 말일 때 하는 말입니다. 반면 역설이라는 말은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는 비논리적인 말이지만, 그 의미가 수긍이 될 때 쓰는 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프닌까 청춘이다.’ 사실 이 말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말하자면 ‘아프닌까 청춘이다’가 아니라 ‘아프닌까 환자다’라고 해야 논리적인 말이 되는 것입니다. ‘아픈데 어떻게 청춘’이 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는 이 말에 모두가 공감을 합니다. 젊은 시절을 다 지나오신 분들이라면 ‘청춘’이 얼마나 아픈지를 알기에 ‘아프닌까 청춘이다’라는 말이 우리는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경우를 역설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의 내용은 이 두 가지 모두를 가지고 있는 내용입니다. 모순과 역설이라는 명제를 말입니다. 성경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성경을 더 이상 읽지 않고 덮어 버리고 싶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 한 예로 구약성경의 내용 가운데 하나님께서 가나안 정복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땅에 살고 있는 이방 민족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면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말고 다 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심기가 매우 불편해 집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논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이방 민족들 가운데 모든 사람을 멸하라고 하시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젊은 남녀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힘도 없고 순진한 아이들과 공경의 대상일 수 밖에 없는 노인들까지 다 멸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라는 명제에 모순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응하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받아 들이기가 쉽지 않은 내용 중에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선한 사람들이 악인의 손에 의해 무참히 도륙당하는 내용에서 과연 선하신 하나님께서 선한 사람들을 그냥 죽게 내버려 두시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공의의 하나님이신가라고 의문을 갖게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또한 여기 계시는 분들 가운데 대부분의 성도님들은 생각해 보지 않은 내용일 것일 겁니다. 오늘 아히멜렉과 놉땅의 85명의 제사장들이 무참하게 학살되는 이 일을 일으킨 장본인인 다윗이라는 것과 그 일이 다윗의 거짓말에 의해서 일어난 것에 대한 그 어떤 비판이나 의심을 우리는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성경 속에 나타난 다윗이라는 인물에 대한 선입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이니까, 뛰어난 성군이니까 그래서 다윗이 한 행동은 왠만해선 틀린 것이 없을 것이기 때문에, 다윗이라는 것만으로 면죄부를 줘 버립니다. 과연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합당한 것일까요? 성경은 정말 다윗의 거짓말을 괜찮다고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오늘 날 그리스도인들은 이 부분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에게 모순으로 보이는 성경 의 이야기가 어쩜 역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골리앗과 싸워 승리한 다윗은 드디어 사울 왕의 사위가 됩니다. 그리고 한 낮 양치기에 불과했던 다윗이 드디어 한 나라의 정치와 군사의 중심에 서게 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다윗과 함께 전쟁터에 나갔다 올 때마다 사람들의 민심이 사울왕이 아니라 다윗에게 점점 더 쏠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사울의 시기와 질투가 시작되고 급기야는 사울이 자신의 왕좌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다윗을 죽이려는 시도를 거듭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의 위협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도망을 가게 되는데, 그 피난길에서 아히멜렉이라는 제사장이 있는 곳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내용이 어제 우리가 묵상했던 바이블타임 사무엘상 21장의 말씀입니다. 함께 사무엘상 21장 1절부터 10절까만 교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무엘상 21:1-10 교독]
그리고 이 일이 있은 후에 사울이 다윗을 뒤쫓는 과정에서 아히멜렉 제사장을 방문하게 되었고 다윗을 도와줬다는 죄목으로 아히멜렉 제사장과 놉땅의85명의 제사장들을 다 죽여버리는 참극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 이 아히멜렉 제사장이 어떤 영문도 모른 체 그의 모든 가족들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사무엘상 22장 13-15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사무엘상 22:13-15 봉독하며 설명해 주기]
방금 읽으신 대로 아히멜렉은 사울과 다윗의 관계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아히멜렉에게는 어떤 잘못도 발견되어 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관점으로 본다면 아히멜렉의 행동은 하나님으로부터 상을 받아도 받아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다윗을 도와줬던 아히멜렉에게 돌아온 것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이 납득이 되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아히멜렉의 일은 그렇다고 쳐도, 다윗의 거짓말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다윗이 한 거짓말은 괜찮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다윗의 거짓말이 괜찮다고 생각하신다면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무엘상 21장 1-2절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사무엘상 21:1-2 봉독하며 설명해 주기]
자 다시 한 번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다윗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옳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문제에 대한 대답이 쉽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적당한 타협점을 찾아 해답을 하나 내어 놓습니다. 바로 “하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거짓말은 거짓말인데 좋은 거짓말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거짓말에 좋은 거짓말과 나쁜 거짓말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분명 거짓말 그 자체는 나쁜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거짓말, 좋은 거짓말이라는 말이 맞는 것입니까? 이것을 일컬어 모순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모순되지 않으신다고 말입니다. 디도서 1장 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6장 18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하지 못할 사실로 말미암아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속성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 역시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순간, 적당하게 타협하면서 거짓말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맞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 것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다윗과 같이 하얀 거짓말을 해도 괜찮은 것입니까? 다윗은 자신에게 분명 그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하얀 거짓말이니 괜찮다고 말입니다. 남을 속이기 위해 하는 거짓말이 아니니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비참했습니다.
내가 하는 하얀 거짓말이 내 생각에는 나도 좋고 상대방도 좋게 만들어 보일지 모르나 결국은 비참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거짓말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쳐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근데 우리의 삶은 어떻습니까? 혹여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기독교적 윤리를 다 잊어 버리고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결국 다윗도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하얀 거짓말이 결국 비극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 22장 22절의 말씀입니다.
[삼상 22:22 봉독]
하얀 거짓말도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 세상에선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살 수 없다고 우리 스스로를 포장하고 위로하고 위안삼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하얀 거짓말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도 쉽지 않았습니다. 제 삶을 돌아보니 하얀 거짓말은 둘째 치고 온갖 거짓말로 점철된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과연 거짓말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교 준비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많이 힘들었습니다. 제가 너무 이상적이거나 유난을 떠는 것은 아닌지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근데 그때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과연 우리 주님도 선한 거짓말, 하얀 거짓말을 하셨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 성경, 사복음서를 다시 살펴 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해 드리면 우리 예수님은 이 땅에 사시면서 하얀 거짓말이라는 것도 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거짓말이라는 것 자체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마태복음 5장 3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만약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살면서 하얀 거짓말을 해도 된다고 생각하셨다면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조금도 그렇게 살지 않으셨습니다. 좋으면 괜찮다는 식으로 살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정직하게 살고자 애쓰시며 살았습니다. 우리 주님이 그렇게 사셨다면 우리도 응당 그렇게 살고자 발버둥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삶속에서 진실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습니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이 한 약속에 대해 쉽게 깨뜨립니다. 약속은 쉽게 깨도 되는 것입니까?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진실해야 합니다. 신뢰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보증수표가 되어야 합니다. 작은 약속이라도 잘 지켜야 합니다. 선한 거짓말이라고 둘러대서는 안 됩니다.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아히멜렉과 같이 선한 사람이 악인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라는 것입니다. 물론 아히멜렉이 선한 사람인지 아닌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 본문은 아히멜렉의 평소 성격과 성품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읽어 내려 가시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내 일이 아닌니까 아무 생각없이 읽으셨습니까? 아니면 성경을 읽는 내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를 고민해 보셨습니까? 선한 자의 고통문제는 우리의 생각과 시각으로 해결하기엔 켤코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모순되는 문제가 우리의 이성적으로 납득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을려고 하지 않는 습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문제는 우리의 생각을 우선적으로 해서 생각하기 보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한 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잠시잠깐 저를 믿고 우리의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시각으로 오늘 이 사건을 한 번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한 번 믿고 따라와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 오늘 제사장 아히멜렉과 85명의 제사장의 죽음은 사울의 죄악과 도엑의 사악함으로 인해 일어난 죄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통해 인간의 사악함으로 인해 얼마나 무서운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살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한 사람의 시기와 질투로 인해 일어날 수 있는 무고한 자들의 고통을 우리는 꼭 기억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 교회 안에서 성도간의 시기, 질투가 어떠한 일을 일으킬 수 있는지를 보고 철저하게 경계의 경계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아히멜렉과 놉의 85명의 제사장의 죽음의 문제를 우리의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한 번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아히멜렉은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 사무엘상 22장 11절에서 아히둡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아히둡은 누구입니까? 사무엘상 14장 절을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함께 찾아 보겠습니다.
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거기 있었으니 그는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의 아들이요 비느하스의 손자요 실로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이 되었던 엘리의 증손이었더라 백성은 요나단이 간 줄을 알지 못하니라
아히둡이 누구라고 나옵니까? 비느하스의 손자라고 합니다. 비느하스는 누구입니까? 엘리 제사장의 아들입니다. 여러분, 일찍이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에게 하신 경고가 있었습니다. 무엇인지 기억나십니까? 바이블타임 25쪽을 한 번 펴 보시기 바랍니다. 사무엘상 2장의 말씀입니다. 22절부터 함께 보겠습니다.
지금 누구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저주의 말씀을 하셨습니까? 엘리 제사장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악입니다. 하나님은 몇 번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는 홉니와 비느하스의 죄로 인해 엘리 가문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에서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성경은 우리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한 책임을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직분의 무게를 늘 날마다 생각하고 기억하며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소명과 사명을 주셨을 때는 그 만큼의 책임감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게 하셨다면 그에 걸맞는 삶에 대해서 책임감을 가져야 할 줄 압니다.
오늘 아히멜렉의 이야기는 인간적인 시각에서는 잘 납득할 수 없는 일일 수 있으나,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 번 말씀하신 것은 그게 우리에게 좋든, 좋지 않든,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것을 아히멜렉의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내용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교회를 다닌다는 것을 우습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시고 경외하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그 어떤 시련과 어려움이 온다고 해도, 그리고 내 상황이 불리해 지고 어려워진다고 해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굳건한 믿음 위에 서야만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제부터 디트로이트한인연합감리교회 성도님들은 높은 수준의 윤리의식을 가져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 자신과 세상의 불신앙과 맞서 영적 싸움을 해야 할 것입니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하기 위해 부르짖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 중보기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교회가 조금 더 바른 신앙적 가치를 가지는 계기가 되길 축원합니다. 다함께 일어나셔서 함께 찬양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