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8:21-35(십자가, 용서의 능력)
십자가, 용서의 능력
(마태복음 18:21~35)
교회는 세상의 조직과 다르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내 맘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관계를 쉽게 끊어 버리거나 나와 함께 의견을 같이 하지 않는다고 해서 적으로 돌려 버리거나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잘못과 허물들, 잘못하는 성도들을 향해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18장 17절의 말씀(어떤 말씀이었습니까?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라는 말씀은 종전의 우리가 생각했던 ‘교회의 치리'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근거가 되는 내용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신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입니다.
오늘 본문때문에 마태복음 18장 17절의 말씀이 교회 안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치리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그들을 더욱 더 안아주고 감싸주고 기도하여야 함을 말씀하시는 내용임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저와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나라에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가 그 빚을 갚을 능력이 없어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되었을 때, 그를 불쌍히 여겼던 주인이 그 빚을 그 자리에서 다 탕감해 줍니다. 그런데 이 빚을 탕감받은 사람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자에게 긍휼을 베풀지 않고 그 빚을 갚지 못한다고 해서 그를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이에 이 소식을 들었던 주인이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를 다시 불러 들려서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가 그의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다시 가둔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누가 봐도 무슨 소리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어렵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우리 신앙생활에 엄청난 충격을 주는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가 우리의 구원과도 직접적인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 21절의 말씀을 한 번 보시겠습니다.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1절의 말씀을 보닌까, 오늘 뜸금없이 베드로가 죄를 범한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이런 질문을 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18장 15~20절의 본문에서 범죄한 사람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한 말씀을 들은 후, 당시 유대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퍼져 있던 용서의 관행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만약 상대방이 여러분에게 잘못을 했을 때, 혹시 실수를 했을 때, 기본적으로 몇 번까지 참으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번정도는 참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 번 더 잘못을 하게 되면 그 잘못한 것에 대한 대응이나 대가를 곧바로 돌려준다고 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상대방의 용서가 3번까지는 있어야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고 합니다. 근데 오늘 베드로는 예수님께 자신에게 잘못을 범한 자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면 좋겠냐는 질문을 하면서 7번이면 괜찮겠냐고 묻습니다. 이 말은 당시 사회에서 통용되던 3번 보다 2배나 많은 데다가 1번을 더 더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 정도로 말해야 예수님의 수제자로서의 손색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십니다. 7번을 용서하겠다고 하는 베드로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22절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무슨 말씀이십니까?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는 말은 죽을 때까지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죽을 때까지 용서를 하든, 상대방이 죽을 때까지 용서를 하든, 여하튼 끝까지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이유불문하고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혹시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 가운데, 아직 마음 속에 풀지 못한, 응어리져 용서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는 분이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깊이 새겨 보아야 합니다. 어렵더라도 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23절부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왜 용서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자세한 예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23-24절의 말씀입니다.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자 23절에 말하는 천국은 어디를 말한다고 했습니까? 그렇습니다. 교회입니다. 다시 이 구절을 풀어서 말하면, ‘그러므로 교회는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뭐라고 합니까? 교회는 누구와 같다고 합니까? 마치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뭐입니까? (여담으로 말씀드리지만) 오늘 날 신학적으로 얘기할 때, 교회는 누구입니까? 저와 여러분입니다. 우리 자신이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23절의 말씀은 명확해 집니다. 오늘 본문의 나오는 어떤 임금이 바로 우리 자신들이어야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자세하게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24절에 한 다른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누구입니까? 만 달란트를 빚진 자입니다. 그런데 만 달란트가 얼마나 큰 돈인지 아십니까? 유대인의 화폐단위 가운데 데나리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데나리온 즉 한 데나리온이 일반적으로 노동자 하루 일당/ 품삯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 달란트라고 하면 한 데나리온의 6천 배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그러니까 만 달란트라는 것은 6천만 데나리온이라는 말입니다. 오늘날로 환산을 하면 하루 임금을 100불이라고 가정한다면, 한 달란트는 60만불입니다. 약 6억원입니다. 따라서 만 달란트는 600,000 X 10,000 달러입니다. 즉 60억만 달러, 한화로 약 6조억원에 달하는 돈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 6조억원이 어느 정도의 돈인지 감이 잘 안 옵니다. 왜냐하면 평생 한번 만져 보지도 못했고 앞으로도 만져 보지도 못할 지 모릅니다. 하물며 예수님 당시에 만 달란트라고 하면 이것은 천문학적인 돈입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 지역의 일년 예산이 100달란트였다고 하니, 지금 가치로 계산하면 계산이 안 됩니다. 여하튼 엄청난 돈입니다.
그런데 어떤 임금에게 만 달란트를 빚진 자가 있었습니다. 이 임금이 이 사람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빚을 탕감해 준 이유가 너무 어의가 없습니다. 25~2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7절에서 뭐라고 합니까? '불쌍히 여겼다'라고 합니다. 그 주인의 눈에 그 종이 불쌍히 보였기 때문에 그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이게 말이 됩니까? 우리는 이런 경험이 없기 때문에 이게 그저 소설속에 나오는 이야기로만 들릴 뿐입니다. 자 여기서 또 한번 질문하겠습니다. 지금 본문에 나온 임금은 누구입니까? 교회입니다. 교회는 누구입니까?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질문합니다.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면서 잊지 말아야 하는 생각이 무엇입니까? 일만 달란트 빚진 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 안에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긍휼히 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스겔 16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4 네가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5 아무도 너를 돌보아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불쌍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천하게 여겨져 네가 들에 버려졌느니라
6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아 있으라 하고
이 본문을 새번역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4 네가 태어난 것을 말하자면, 네가 태어나던 날, 아무도 네 탯줄을 잘라 주지 않았고, 네 몸을 물로 깨끗하게 씻어 주지 않았고, 네 몸을 소금으로 문질러 주지 않았고, 네 몸을 포대기로 감싸 주지도 않았다.
5 이 모든 것 가운데서 한 가지만이라도 너에게 해줄 만큼 너를 불쌍하게 여기고 돌보아 준 사람이 없다. 오히려 네가 태어나던 바로 그 날에, 사람들이 네 목숨을 천하게 여기고, 너를 내다가 들판에 버렸다.
6 그 때에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가다가, 핏덩이로 버둥거리는 너를 보고, 핏덩이로 누워 있는 너에게, 제발 살아만 달라고 했다.(핏덩이로 누워 있는 너에게, 제발 살아만 달라고 했다.)
뭐라고 하십니까? 누군가가 핏덩이로 버려져 있는 나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합니다. 근데 그 누군가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저를 더 가슴 저미게 만드는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핏덩이로 누워 있는 너에게, 제발 살아만 달라고 했다
정말 가슴아픈 사랑아닙니까? 이런 사랑을 가슴저민 사랑이라 표현합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받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가 바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하나님의 긍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이런 분이십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불쌍히 여기셔서, 만 달란트보다도 더 귀한, 죽다 깨어나도 돈으로는 계산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에게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우리 주님께서 대신 갚아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인 것입니다.
우리 죄의 대가를 단번에 탕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일만 달란트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찬송가 404장은 이렇게 찬송하고 있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로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후렴)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그크신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후렴)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찬송가 404장의 1절 가사가 오늘 본문의 말씀과 너무 일치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 안에서는 용서가 필수적이어야 합니다. 오늘 이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자가 고작 백데라리온(약 만불)을 빚진 자를 옥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런데 백데라리온 빚진 자가 어떤 자입니까? 28-30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누구라고 합니까? 우리가 가진 개역한글은 ‘동관’이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방금 전 읽은 것은 개역개정판 성경입니다. 바로 ‘동료’라고 합니다. 쉽게 말씀드려 친구입니다. 가까운 사이의 사람입니다.
자 그렇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오늘 18장의 내용은 교회 안의 교회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만 달란트 빚진 자는 누구를 의미합니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백데라이온 빚진 자는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있는 형제, 자매들입니다. 우리 가족일 수 있습니다. 우리 일가친족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내 옆 자리에 앉아 있는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일 수 있습니다. (한 번 쳐다 보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엄청난 용서를 받은 자이면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는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값없이 용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오늘 이 말씀을 듣고도 마음 문이 열리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35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더 기억하시면서 힘을 내었으면 좋겠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여기서 '마음으로부터'라는 단어를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입술로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습니다. 겉으로만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이 이미 우리를 그분의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시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남을 용서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나를 아프게 하고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이 쉽게 용서되지 않습니다. 용서해야 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용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었지만 십자가 때문에 용서함 받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나는 용서하지 못하지만, 십자가를 붙들고 용서하겠다고 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한 되지만, 십자가의 능력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지금 용서치 못하는 사람들이 있으십니까? 십자가를 다시 한 번 쳐다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도 저 십자가로 용서함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다시 바라보고 용서치 못하는 그 사람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치 못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때문에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에서 피흘리셨기 때문에서 그 대가로 우리의 그 어떤 허물도 보지 않으시고 우리를 받아주셨습니다.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가 있기에 용서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고난주간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못했던 이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기간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또한 우리 교회가 이런 넉넉한 용서의 아름다움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용서의 아름다움이 있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