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6:13-20(고백한 대로 되리라)
고백한 대로 되리라
(마태복음 16:13~20)
어떤 교회에서 은퇴하신 목사님을 이을 새로운 목사님을 청빙하기로 하였습니다. 청빈위원회가 구성이 되고, 청빈공고를 내었습니다. 그리고 한 젊은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청빈위원들과 교인들은 이 모시고먼저 설교를 듣기로 했습니다. 이 목사님의 첫 설교를 모두가 기대하는 마음으로 듣고자 모였습니다. 평소 나오지 않던 교인들까지 나오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목사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강단에 올라 한참을 서 있다가 교인들을 향하여 뜬금없이 물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오늘 무슨 설교를 할지 아십니까?" 그러자 성도들은 이구동성으로 ‘아니요.’라고 말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성도들에게 "여러분이 모르는데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하고 강단에서 내려오더랍니다. 갑자기 분위가 싸해졌습니다. 교인들이 기가 막혀서 웅성대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청빈위원회 모였습니다. 청빈위원장이 말합니다. 다시한번 더 기회를 드려봅시다. 그리고 청빈위원회에서는 다음 주 다시한번 더 설교를 그 목사님께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한주간이 지나, 목사님께서 다시 오셨습니다.
그런데 강단에 오르더니 또 묻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제가 무슨 설교를 할지 아십니까?" 지난주에 모른다고 하니 자신도 모른다고 내려갔으니까 이번에는 성도들이 이구동성으로 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목사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럼, 됐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는데 제가 굳이 설교할 필요가 있습니까?"라고 말씀하고는 강단에서 내려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 어이가 없었던 청빈위원들은 오기가 차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더 청빙을 해서 설교를 듣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끼리 작전을 짰습니다. 만약 이번에도 목사님께서 오늘 설교가 뭔지 아냐고 묻는다면, 예배당 안의 반은 안다고 하고, 절반은 모른다고 하기로 말입니다. 드디어 목사님께서 셋째 주에 다시 강단에 올라갔습니다. 또 묻습니다. "여러분, 오늘은 제가 무슨 설교를 할지 아십니까?" 성도들은 약속된 대로 반은 안다고 하고, 반은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목사님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럼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고 내려오더랍니다.
여러분! 전도가 무엇입니까? 전도가 바로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전해주는 것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부르는지에 무척 대해 궁금해 합니다. 우리 예수께서도 그렇셨는 것 같습니다. 많은 설교도 하시고, 많은 기적도 행하셨는데 그런 것을 듣고 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받아들일까라는 생각이 있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제각기 들은 이야기를 꺼내 놓았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6장 13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리고 제자들이 말합니다.
이르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세례 요한: 헤롯의 이야기속에서 알 수 있음
엘리야: 구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죽지 않고 승천 인물 둘 중 하나
예레미야: 예루살렘 멸망을 예언, 당시 제사장들과 왕들에게 핍박을 받음.
선지자: 기적과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하는 사람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세례요한이나, 엘리야, 예레미야 혹은 선지자 중 한 사람이 살아 돌아왔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대답을 들으신 예수께서는 마침내 제자들을 향해서 물었습니다. 15절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아마도 이때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하나하나 유심히 쳐다보셨을 것입니다. 하나하나에게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에게 있어서 나의 의미는 무엇이냐?”
대부분의 제자들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을 것입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허둥댔을 것입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흘렀을 것입니다. 그러다 마침내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은 누구이시라는 말입니까?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대답이 몇 가지로 구분됩니다. 우선 다른 복음서들과 비교해서 마태복음이 가지고 있는 두드러진 특징이 있는데 첫번째가 예수님은 예언의 성취자요 율법의 참 해석자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반복해서 많이 등장하는 말이,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함이다.’라는 표현입니다.
두번째는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 왕이시라는 것입니다. 유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다윗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라면 예수님도 왕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과 2장에 보면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이렇게 물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에 계십니까?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습니다.“ (마태복음 2:2)
심지어, 조소썩인 물음이라 할지라도 빌라도나 로마군인들, 최고 의회 의원들까지 예수님을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자기들도 모르게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한 셈이 되고 만 것입니다.
마지막 세번째는 지금까지 말씀드린 이 모든 표현들보다 훨씬 더 예수님을 잘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마태복음 기자가 강조하고 있는 표현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입니다. 아들, 내 아들, 그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 등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씌여진 곳이 무려 스물한 번이나 됩니다. 그리고 이 본문들을 살펴보면 거의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또는 자기도 모르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우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친히 내리신 호칭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3:16-17)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마태복음 14:33)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마태복음 17:5)
심지어는 사탄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마태복음 4:2-3)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것도 죽은 우상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즉 구세주이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신앙고백의 핵심이요, 전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주님은 우리에게도 묻고 계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지금까지 뭐라고 대답하며 살아오셨습니까? 또 지금 뭐라고 대답하고 계십니까?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바로 이 물음의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대홍수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입니다. 그 노아에게 세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이 셈입니다. 그 셈의 후손들이 오늘의 이스라엘 백성을 이루게 되는데 셈의 구대손이 데라입니다. 데라도 역시 아들 셋을 낳았는데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입니다. 데라는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해서 바빌로니아의 우르를 떠나 하란에 이르렀고, 거기에 자리를 잡고 살다가 이백다섯 살 때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데라가 백마흔 다섯 살 때, 그리고 아브람의 나이 일흔다섯 살 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셔서 떠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창세기 12:1-4)
아브람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길을 떠났습니다.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함께 가나안을 향해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 큰 민족을 이루어주실 줄 믿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때 그의 나이 일흔다섯 인데도 아직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묵묵히 떠나갔습니다.
가나안 땅에 가서 살다가 조카 롯이 아브람의 곁을 떠나간 후 하나님께서 다시 아브람에게 “너의 자손이 땅의 먼지처럼 많아지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은 또 다시 묵묵히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아들이 없으니 아무래도 자기의 종인 엘리에셀이 자기의 상속자인가 생각했습니다. 당시 풍습에 의하면 아들이 없는 경우 종이 상속을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시 아브람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그 사람이 네 상속자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상속자가 되리라 하시고 /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세기 15:4-5)
그리고는 그 끝에 이렇게 덧붙어 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세기 15:6)
그리고 아브람이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는 소동을 겪은 후에 마침내 아브람의 나이 아흔아홉이 되었을 때에,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창세기 17:1-2)
아브람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있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7장 4-8절의 말씀을 찾아 보겠습니다.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창세기 17:4-8)
결국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 이삭이 태어났고, 그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리고 이때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신 표로 주신 것이 바로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어 주신 것입니다.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라고 바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브라함에게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나왔습니다.
다같이 이사야 51장 1-2절을 찾겠습니다.
1 의를 따르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내게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2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택하시고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열 두 지파를 세우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형성케 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은 거기에서 모든 백성이 나온 “유일한 바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던 일이 오늘의 본문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던 일이 이제 시몬 베드로에게 일어났습니다.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의 이름을 바꾸어 주셨고, 그를 통해 놀라운 약속을 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7-18절입니다.
1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17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베드로의 원래 이름은 시몬입니다. 오늘의 본문에는 “바요나, 시몬”라고 되어 있는데 이 말을 풀이하면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아람어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시몬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셨습니다. 그의 이름을 바꾸셨다는 말입니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쉽게 말하자면 “너는 ‘돌’이다. 나는 이 ‘바위’ 위에 내 교회를 세우겠다.”
이사야가 보기에 아브라함은 믿음의 반석이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열 두 지파가 생겨나게 하셨습니다. 물론 그 바탕은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던 믿음이었습니다. 그것과 똑같이 예수께서 베드로라는 사람의 이름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그에게 베드로, 바위라는 이름을 주셨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근거는 역시 베드로가 했던 신앙고백, “당신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즉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심으로써 교회로 하여금 두 번째 아브라함의 후손,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신약시대의 우리는 바로 반석 위에 세운 교회를 통한 신앙고백, 무엇입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우리 역시도 동일하게 고백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그냥 외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이 담겨져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제2의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 있는지가 바로 여기 이 말씀에 근거해서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 바울은 우리가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을 한 자에게 우리 예수님은 놀라운 선물을 주십니다. 시몬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신 예수께서는 그에게 놀라운 선물을 주시는데, 바로 하늘나라의 열쇠였습니다. 19절입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원래 이 구절은 이사야서 22장에 나오는 말씀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20 그 날에 내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아김을 불러
21 네 옷을 그에게 입히며 네 띠를 그에게 띠워 힘 있게 하고 네 정권을 그의 손에 맡기리니 그가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의 집의 아버지가 될 것이며
22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
하나님께서 엘리아김을 불러 다윗 집의 열쇠를 줄 것인데,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나오는 엘리아김은 열왕기하 18장 18절에 보면 히스기야 왕의 궁내대신입니다. 궁내대신이란 왕궁의 모든 일을 처리하는 장관이고, 왕궁에 관계되는 모든 열쇠를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의 열쇠”를 가진다는 것은 ‘직원 중의 우두머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다는 것은 그를 교회의 우두머리, 무리들 가운데 우두머리로 삼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왜 여기서 하늘나라의 열쇠라는 말이 등장했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누군가가 하늘나라의 열쇠를 가졌다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열쇠를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요? 마태복음 23장에 그 힌트가 나와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 13절을 보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당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치면서 그 율법의 해석 권리를 자기들만이 독차지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들도 율법의 참된 정신을 지키지 않고, 다른 사람들도 함부로 정죄하면서 아무도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섰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하늘나라 열쇠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행세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그 하늘나라 열쇠를 빼앗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맡기셨습니다. 즉 이제는 더 이상 율법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음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나라의 열쇠는 바로 믿음입니다.
이제 율법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이제 은혜의 시대가 다가왔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 시대가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우리 예수님께서 열어 놓으셨습니다. 그 길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이루어집니다. 오늘의 본문 바로 다음에 나오는 십자가 사건에 대한 첫 번째 예고가 그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이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를 알면 지금까지 저와 여러분이 무엇을 어떻게 잘 못 믿고 왔는지가 보입니다. 그리고 내가 구원받은 자인지, 아닌지가 확실히 들어납니다. 다음 주 십자가 설교를 기대하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택하셔서 바위가 되게 하심으로 새로운 시대를 여신 것처럼 예수께서 시몬을 택해 반석이 되게 하심으로써 다시 새로운 시대를 여셨습니다. 그 새로운 시대의 열쇠는 하늘나라의 열쇠요, 이는 곧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하나님이시라는 믿음, 바로 그것입니다. 이 믿음은 죽음의 문들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고백으로 우리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를 가지고 우리가 기도할 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명확히 인식하고 인정하고 그 분께 우리의 문제를 고백할 때,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입니다. 우리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고백을 해야 합니다. 이 고백이 없으면 기도해도 무용지물입니다. 먼저 이 고백이 있어야 됩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 교회를 다니고, 하루에 몇시간씩 기도를 한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을 가지지 않고 교회를 다니고,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과 구원은 거짓입니다. 기도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고백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그리스도(메시야)이며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즉 다시 말해,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기도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내 문제가 해결되어 집니다. 저와 여러분이 살고, 우리 교회가 삽니다. 다른 것을 부러워 마십시오. 오직 저와 여러분은 이 믿음의 고백이 있는 진정한 성도가 되셔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 믿음 가지고 험한 세상 끝까지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