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4:1-12(누가 진짜냐)
누가 진짜냐?
(마태복음 14:1~12)
오늘 본문의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준비하면서 한가지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는 왜 14장 전반부에서 생뚱맞게 요한의 죽음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인가, 마태는 요한을 죽인 헤롯에 대해서 격렬하게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로 오늘 본문을 기록한 것인가, 아니면 요한의 죽음을 통해 뭔가를 우리에게 교훈하기 위해서 오늘 본문을 기록한 것인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도저히 제 개인적인 성경 관점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습니다. 28장이라는 길지 않은 성경을 기록하면서 굳이 이야기 하지 않아도 될 요한의 죽음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 영 마음에 석연치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다 기록해도 부족할 판에 요한의 죽음을 기록하는 마태의 의도가 무엇인가가 제 마음에 걸렸습니다. 한참을 본문과 씨름하다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과 마지막 12절에서 마태가 요한의 죽음을 자세히 기록하면서 말하고 싶었던 것, 마태가 의도했던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진실을 왜곡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이런 성향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인간에게 나타난 병리적 증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난 이후, 자신의 죄를 숨기기 위해, 자신을 합리화하기에 바빴던 인류조상들의 모습속에서 우리는 쉽게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도 가끔은 우리 자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뻔히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아니라고 부정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 가운데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얽혀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종교가 사회를 지배하던 시대인 중세시대,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기존의 세계관을 뒤집는 이야기를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하게 됩니다. 당시 중세 교황청에서는 지구가 태양을 도는 것이 아니라, 태양이 지구를 돈다라고 하는 천동설을 지지하고 있었지만,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이에 대한 반대 주장을 펼쳤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근데 이 이야기는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과 조금 다른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것을 갈릴레오 갈릴레이보다 훨씬 이전 사람인 리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가 발표하였고, 이를 당시 교황청은 인정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당시 교황청에서는 지동설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지구가 태양을 돈다라는 지동설에 대한 연구가 교황청 내부에서도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가 발견한 지동설을 새로운 천체 발견임을 격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유명세를 가졌떤 갈릴레오 갈릴레이 역시 지동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교황청에서는 갈릴레오 갈릴레이에게 공식적으로 지동설의 뒤받침할 근거를 찾기를 지시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지동설을 지지했던 교황청에서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반박하며 부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갑자기 교황청의 태도가 바뀌게 되었는가라는 의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코페르니쿠스에 의해 지동설을 어느 정도 인정하던 교황청의 태도가 바뀐 이유가 무엇이었냐는 것입니다. 교황청의 이런 태도변화가 다름 아닌,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증명하는 과정에서 교황청 소속의 대학교수들을 비난하고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뻔히, 지동설이 더 확실한 천체이론임을 알면서도 갈릴레오 갈릴레이와 대립하게 된 교황청 소속 대학교수들이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지동설을 부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지동설을 증명하지 못한 갈릴렐오 갈릴레이를 천동설을 부정하는 이단으로 몰아 버렸다는 것입니다. 진실을 뻔히 알면서도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 들이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이와 비슷한 경우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듣고 본 것들을 애써 왜곡하려고 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오늘 본문을 살펴보기 전, 오늘 본문과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는 13장 53-58절의 내용을 먼저 살펴보고 오늘 본문내용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13장 53-58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지난 주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천국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셔서 그곳에서도 천국에 대해, 그리고 복음을 전파하십니다. 근데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13장 54절의 말씀입니다.
54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던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고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다 놀랐습니다. 근데, 이렇게 놀란 이유가 따로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55-56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55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56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 그런즉 이 사람의 이 모든 것이 어디서 났느냐 하고 그리고 58절에서 말합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방금 읽었던 성경말씀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놀라게 한 사람이 누군지 너무 잘 알고 있다는 말합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에게 능력을 행하신 예수님이 이런 지혜와 이런 능력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지혜와 능력은 하나님만 가지고 계시는 것인데, 평범한 목수의 아들인, 30여년 평생을 내가 봤던 이 사람이, 무엇보다도 그의 형제들과 누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자신들이 너무나도 잘 아는 예수가 그런 지혜와 그런 능력을 가졌을리가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신들은 예수를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뻔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들과 행하시는 능력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도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우리의 메시야가 아니라, 자신들이 아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을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애써 부정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시 예수님에 대해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인정하기 보다 끝까지 예수님을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인 14장 1-2절에서도 예수님을 부정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또 등장합니다. 분봉왕 헤롯입니다. 1절과 2절을 보시겠습니다.
1 그 때에 분봉 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2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더라
오늘 본문에서 헤롯은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병환자를 고치신 것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광풍이 불어 크게 출렁이는 바다를 꾸짖어 잔잔케 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귀신 들린자와 중풍병자를 고치시고, 한 관리의 죽은 딸을 살리시고, 열 두해를 혈루병으로 앓고 희망도 소망도 다 잃어버린 여인을 고치신 것을 듣습니다. 맹인을 고치셨습니다. 말 못하는 사람을 고치셨습니다. 각종 병든 자들을 다 고쳐 주셨습니다. 병든 자, 가난한 자, 그 어떤 사람이라도 예수님께만 나아가면 모든 문제를 해결받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게 된 헤롯은 두려움에 싸이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잘못을 지적한 죄명을 씌워 세례 요한을 투옥하였고 급기야는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 세례 요한보다 더 많은 능력을 행하는 예수라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소식은 자신의 잘못을 숨기려고 했던 헤롯에게 두려움으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헤롯에게는 부담이었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례 요한도 부담되었는데, 그래서 그 세례 요한을 제거하였는데, 그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있다는 소식에 두려웠을 것입니다.
누가복음 3장 16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요한이 모든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거니와 나보다 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할 수 없는 높으신 분, 위엄과 능력이 있으신 분, 성령과 불로 심판을 베푸시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예수님에 대해서 들었던 헤롯, 역시도 예수님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헤롯은 예수 그리스도를 세례 요한의 환생으로 폄하하려 한 것입니다.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2절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2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는 세례 요한이라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능력이 그 속에서 역사하는도다 하더라
예수님 자신이 능력이 많으신 분이 아니라, 그저 세례 요한의 능력이 덧입혀져 그런 것이라고 위안하려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과 같거나 그보다 못하다고 생각해야만, 자신의 능력으로 예수도 해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헤롯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의 환생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는 오늘 본문의 세례 요한의 죽음을 자세하게 기록함을 통해,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환생이 아니라, 삼위일체되시는 하나님 되심을 말하려 하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분명 죽었고, 세례 요한이 환생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진정한 하나님이심이시다고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 증거들로 다음 주에 계속되는 예수님의 기적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 주에 계속 나누게 될 것입니다.
오늘 날 믿는 신자들에게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누구입니까라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십니까라는 물음입니다. 당연 우리의 신앙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당연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라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는 정직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신앙의 대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로, 내 인생의 주인으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고백한다고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신자들의 실질적인 반응은 오늘 성경 본문에 나타나는 사람들과 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한다고 하면서, 어떤 이들은 우리의 삶의 주인으로 예수님을 인정하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삶의 주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면 우리 삶이 불편해 지기 시작합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 제한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내 시간을 통제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내 물질을 통제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내 뜻과 생각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제약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삶의 주인이 되길 원치 않습니다. 그냥 허울 좋은 종이 호랑이로 벽에 걸려 있어 주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이 내 삶에 관여하는 분이 아니시다고 생각하길 원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내 삶에 관여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 삶속에서 일어나는 작고 큰 일들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예수님께서 이끄시는 삶이 아니라고 부정합니다. 내 주위에서 일어난 일들이 우연적으로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다고 치부해 버립니다.
두번 째로 어떤 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두려운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인정을 하면 내 죄가 다 들어나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려 합니다. 그저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은 주일날 교회에 와서 예배드릴 때만,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지, 내 삶속에서 나의 모든 것을 보고, 알고 계시는 하나님으로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이런 분들은 자신의 삶의 진실이 들어나는 것이 두려운 사람들입니다. 천국은 가야 하겠지만, 하나님께서 내 삶을 간섭하셔서 콩나라 팥나라하는 것은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마태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이 세상 어느 누가 아무리 예수님을 부정하고 인정치 않을 지라도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시다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신 것이 인간들에게 불편한 진실이 아니라, 우리 믿는 자들에게는 엄청난 복이됨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주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그분 안에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생사여탈권을 가지신 분이 우리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만이 천국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는 능력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이 전능하신 하나님되시는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불편한 진실이 아니라, 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좋든 싫든 예수님은 우리 삶의 주인이십니다. 우리 물질의 주인이십니다. 우리 물질이 우리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십일조가 무엇입니까? 열개 중에 아홉개는 내것이고 하나가 하나님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십일조란 물질의 주인은 하나님이심을 내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림으로 우리의 신앙을 증명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십일조가 부담스러우십니까?
우리 육체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육체를 함부로 관리해서는 안 됩니다. 음식 함부러 먹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잘 먹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시간이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예수님의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이것을 명확히 할 때, 우리 인생의 복잡한 문제가 해결받을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만이 천국을 들어가는 열쇠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땅에서 우리가 살아 있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성도가 된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고 그분의 삶을 닮아 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냐를 먼저 명확히 하고 우리의 신앙생활을 시작해야 합니다. 천국은 그저 교회 마당만 밟고 있다고 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17장 3절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번 한주간도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한 주가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