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

빌립보서 4:10-13(하나님을 누리는 삶 그 세 번째-자족하는 삶)

오비도제일장로교회 2020. 5. 7. 11:14

하나님을 누리는 삶 그 세번째-자족하는 삶

(빌립보서 4:10-13)

 

예전에 한국에서 이런 광고 문구가 있었습니다. “2% 부족할 때..." 지금도 우성에 가시면 가끔 보실 수 있는 음료수 이름입니다. 이 광고는 사람들의 마음이 충분히 채워지지 않음을 파고 들면서, 자신의 회사 상품을 쓰게끔 유도한 광고입니다.

 

인간은 만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삶을 삽니다. 그렇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로부터 물려받은 원죄의 영향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족하지 못하는 죄로 인해 인류의 비극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부족함 없이 인간들에게 다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관리하게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누리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인간들의 것이니 그저 창조주 하나님 한분만 보고 만족하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것에서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에 대한 욕심이 생긴 것입니다. 그것 없어도 잘 살 수 있는데, 유난히 그것 하나에 집착하게 된 것입니다. 집착이 결국 죄를 잉태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욕심이 인간을 영원한 형벌로 빠지게 한 것입니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스스로가 만든 욕심이 우리 스스로를 파멸하게 만든 것입니다. 또한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결국 원죄를 이어받은 우리 역시도 만족감을 누리지 못하며 살게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꾸 더 가지려고 합니다. 물질도 더 가지려고 합니다. 명예도 더 가지려고 합니다. 권력도 더 가지려고 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가져야 산다. 더 가져야 잘 살 수 있다. 니가 가지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빼앗아라.’ 이 얼마나 비참한 삶의 소리입니까? 날마다 세상에 나가면 이런 소리가 사람들을 하루에도 수없이 유혹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비단 세상 사람들만의 일이겠습니까? 우리들 가운데, 믿는 성도들 가운데도 소유에 대한 애착과 집착을 버리지 못한 분들이 종종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 한 예로 교회에서 큰 소리가 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 때문입니다.

 

교회에서 큰 소리를 내는 분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세상에서 가지지 못한 것을 교회에서 가지려고 하는 분들임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가져보지 못했기 때문에, 교회에서라도 뭔가를 가져 보려고 아둥바둥하는 것입니다. 권력을 잡으려고 합니다. 명예를 가지려고 합니다. 근데, 안타까운 것은 이런 것들을 교회안에서 가져봤자 뭐에 쓸려고 그러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님께서 물질을 주시고, 직분을 주실 때는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라고, 더 낮아져서 겸손히 주님을 섬기라고 물질과 직분을 주시는 것인데, 그것이 명예를 얻은 것인냥 착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어떤 일에서든지 소리를 높여서는 안됩니다. 겸손히 순종하는 모습을 먼저 배워야 합니다. 우리교회에는 이런 분들이 없을 줄 믿습니다.

 

여러분은 이 미국땅에서 이민자의 삶을 살면서 얼마나 만족하시면서 사셨습니까? 지금까지 사시면서 만족을 느끼십니까? 제가 볼 때 이 미국땅에서 이민자의 삶을 살면서 만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사는 분들이 그리 많은 것 같지 않습니다. 이제 자녀도 다 컸고, 할 만큼 다 해 보았으니, 만족하신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스스로의 얼굴을 한 번 돌아보길 원합니다. 자신을 속이지 마십시오. 아직까지 우리는 우리 손에 움켜지고 있는 것을 놓을 준비를 하지 못했습니다.

 

가끔 저는 학교나, 교단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신청서(Application form, 원서나 참가 신청서)를 작성할 때가 많습니다. 그 신청서를 작성하다가 보면, 어김없이 기록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비상연락처(Emergency Contact)’입니다. 여러분은 그 비상연락처에 누굴 적게 되십니까? 만약 적어야 할 사람의 이름과 연락처가 생각나지 않는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친구라도 있어야 합니다. 내가 뭔 일을 당했을 때, 즉시, 연락을 할 수 있는 그런 사람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친구들이 우리 주위에 남아 있습니까? 가지려고 발버둥치며 살다보니, 오히려 더 많이 가진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것이 더 많은 인생을 살진 않으셨습니까?

 

만약 지금 당장 죽는다면, 나를 위해 서럽게 울어줄 누군가가 있으십니까? 만약 이 물음에 누구 한 사람이라도 떠 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성공한 삶을 산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라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국의 유명한 작가 찰스 디킨스가 쓴 '크리스마스 캐롤'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이 책을 한번 쯤은 다 읽어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 가운데, '스크루지 영감'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잘 아시는 내용입니다. 이 스크루지 영감은 소문난 구두쇠입니다. 인정사정이 없습니다. 내것밖에 모릅니다. 남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울어도 쳐다보지 않습니다. 나만 가지면 됩니다. 내 배만 채우면 됩니다.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남을 상처주면서까지 끌어 모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입니다. 스크루지 영감이 밤에 잠을 자다가 꿈을 꾸게 됩니다. 그 꿈속에서 자신이 지금까지 모아 두었던 것들을 제대로 써 보지도 못하고, 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승사자가 그를 데리고 스크루지 영감의 무덤으로 안내합니다. 스크루지 영감은 지나 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무덤 앞에서 뭐라고 말하는 지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스크루지 영감은 꿈에서 깨어납니다.

 

만약 우리는 우리가 이 스크루지 영감처럼 우리 자신의 무덤 옆에서 지난 가는 사람들로부터 어떤 말을 듣게 된다면, 어떤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까? 우리는, 저 사람은, 저 분은 정말 멋진 인생을 살다간 분이었어! 저 분은 정말 모두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분이었어!라는 말을 들을 수 있겠습니까?

 

디모데전서 6 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는 이 땅에 올 때,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은 다 하나님께서 주셔서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주셔서 내 것처럼 쓰고 있는 것 뿐입니다. 아직까지도 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정말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어리석도 이만 저만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최상급으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내 것 아닙니다. 내 지식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내 능력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식들도 내 것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근데, 이렇게 많은 것을 왜 주셨습니까? 이 땅에 살면서 즐겁게 살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것 가지고 내 인생 즐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를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남편과 아내를 통해 즐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밤낮 피터지게 싸우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서로 행복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자녀를 왜 주셨습니까? 자녀를 통해 즐거워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내 맘대로 로버트처럼 부려먹으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물질을 왜 주셨습니까? 그 물질을 통해서 맛있는 것 사먹고, 즐거워하라고 주셨습니다. 근데,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을 때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나만, 내 가정만, 잘 먹고 잘 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으로 함께 나누며 행복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걸 나눠 줄 때는 내 것이라 생각하고 나누지 말고, 주님이 주신 것이니, 주님의 것을 함께 나누는 것이라는 겸손함을 잊지 말고 나눠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즐겁게 내 인생을 살라고 주신 내 가정, 물질, 명예, 힘과 능력을 가지고도 즐겁지가 않습니까? 왜 행복하지 않습니까? 내가 하는 일이 왜 짜증스럽기만 합니까? 왜 더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이 가득차 있습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만족함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게 주어진 이 모든 것에 대해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더 있어야 정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남보다 더 가진 것을 보지 않고, 남 보다 더 가지지 못한 것만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더 가지려고 합니다. 더 빼앗아야만 승리한 것 같이 생각이 됩니다.

 

이러한 삶과 이러한 생각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하는 삶이 아닙니다. 이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더 가지려고 발버둥쳐야 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명예가 아니라, 힘과 능력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사랑하는 마음이어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사랑하기 위해 발버둥쳐야 합니다.

 

내 구주 예수를 더욱사랑 엎드려 비는 말 이것일세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우리가 더 빼앗으려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처럼 물질을 탐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어가는 영혼들, 지옥불을 향해 달려가는 저 영혼들을 사탄과 마귀로부터 한 사람이라도 더 빼앗으려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현재 지옥불로 끌려가고 있는 사람이 내 가족이라면 우리는 더 애타는 마음으로 내 가족을 구원하기 위해, 사탄과 마귀로부터 빼앗기 위해 전투를 해야 합니다.

 

'주객이 전도되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의미인지 다들 아실 것입니다. 주체와 객체가 바뀌었다라는 뜻입니다. 즉 다시 말해, 뭔가 앞뒤가 잘못되거나, 뒤바꼈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시골마을의 보건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매일같이 아침에 와서 오후까지 다른 환자들이나 의사와 한담을 하면서 소일을 하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하루도 빠지지 않던 노인이 어느 날, 사흘이나 보건소에 오지를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흘 지나서야 다시 나타났습니다. 며칠 만에 보건소에 온 노인을 보고 의사가 물었습니다.

 

"아니, 매일 오시더니 사흘이나 안 오셨네요.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있으셨나 봅니다."

 

이에 노인이 말합니다.

 

", 별일은 없었네! 그저 내가 몸이 좀 좋지 않아서 한 사흘 집에서 쉬었어!"

 

여러분 이야기가 이해되십니까? 보건소의 목적이 병을 치료하는 것인데, 이 노인은 오히려 병이 났다는 이유 때문에 보건소에 오지 않았습니다. 아프지 않을 때에는 보건소에 가고, 아플 때에는 집에서 쉰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주객이 전도되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더 가지려 하고, 무엇을 더 빼앗으려 해야 하는지가 정확해야 합니다. 주객이 전도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과 명예, 힘과 능력을 더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것에 부족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음전도에 갈증을 느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정상적인 삶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그런 것에 갈증을 느끼며,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 것들을 더 가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입니까?

 

만족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디모데전서 6 8절의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 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있으면 됐다라고 말입니다. 더 이상 욕심부리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는 스스로 있는 것을 족한 줄로 알고 더 있으면 함께 나누는 삶을 살아라고 말합니다. 바로 자족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가지게 되는 행복한 삶은, 행복한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삶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족한 줄로 알 때, 행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보다 내가 가진 것이 하나라도 더 있음을 깨달을 때, 만족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내 삶의 기쁨과 즐거움은 만족하고 자족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스스로 족한 줄을 알고, 내게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시작될 때,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신바람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얼굴에 왜 수심이 가득차게 됩니까? 웃는 얼굴이 아니라, 항상 찡그린 얼굴이 되는 것입니까?

 

자족하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 마음도 밝아지는 것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을 때, 여유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을 때, 지금 내가 호흡하고 있음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을 때, 하루 세끼 밥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을 때, 비오는 날, 바람부는 날, 비바람 막아주는 집이 있음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있을 때, 건강이 있음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불평불만이 사라지고, 현재의 내 삶이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자족한 마음이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것 또한 감사처럼, 자원하는 마음처럼, 훈련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신앙생활했지만, 교회다녔지만, 성숙한 신앙인이 되지 못한 이유, 자족하는 믿음을 가지지 못한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훈련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절대로 저절로 생겨나지 않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기만 하면 믿음이 저절로 생겨서 자신이 믿음의 사람이 된다고 말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면, 직분은 받을 수 있을지 모르나, 믿음이 저절로 자라지는 않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로마서 10 17절에서 분명히 말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이란 말씀을 듣고 배움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냥 교회를 매주 왔다 갔다 한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어쩜 그냥 교회만 오랜 시간 다녔던 분들이 초신자보다 못한 신앙이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이번 주까지 말씀을 나눈 감사와, 자원하는 심령, 자원하는 마음은 그냥 교회 다닌다고 절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훈련을 통해서 만들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4 11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도 그의 일평생 그가 배운 것이, 터특한 것이 바로 자족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여기서 '배웠다'라는 단어의 의미가 경험이나 반복적인 연습을 통해 얻게 된 것을 말합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자족하는 마음도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단히 노력해서 자족하는 마음을 갈고 닦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지금 내 환경에서 만족하는 마음을 단련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 더 가지고 싶은 욕망이 올라와도 억누르며 그 마음을 끊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가진 것을 똑같이 갖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도 그 마음을 절재해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12절에서 말합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백전노장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십니까? 들리셔야 합니다. 적어도 신앙생활 교회에서 몇 십년 했다고 자랑할 수 있을려면 오늘 바울의 이런 자신있는 말을 할 수 있는 성도들이 다 되셔야 합니다. 성도의 신앙성숙의 척도가 어디 있는 줄 아십니까? 바로 자족하는 모습에 있습니다.

 

바울이 이 빌립보서를 쓸 당시 나이가 예순(60)을 훌쩍 넘긴 나이였습니다. 로마감옥에서 죽게 되기 몇년 전의 일입니다. 그가 로마감옥에서 마지막으로 그가 개척한 교회인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당부하는 말이 바로 자족하는 삶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 자족하는 삶을 바울 자신에게서 보고 배우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 4 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 자신을 보고 배우라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뭘 보고 배우라는 것입니까? 바로 바울 자신이 터득한 자족하는 삶의 비결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우리 자녀들에게 혹은 신앙생활을 갓 시작한 어린 성도들에게 자신있게 뭘 이야기해 줄 수 있습니까? 뭔가 하나라도 말해 줄 있다면 훌륭한 성도입니다. 그러나 만약 자신있게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면, 오늘 바울이 외치는 이 자족하는 성도의 미덕을 훈련해 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왜냐하면 자족하는 삶의 비결을 터득한 성도만이 13절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말씀만큼 성도들에게 사랑받으면서도 성도들이 이 말씀의 진의를 오해하고 있는 말씀도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의 강해는 다음 기회에 하기로 하겠습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시편 23편의 시는 다윗의 주옥같은 시입니다. 또한 믿는 성도라면 누구나 할 것없이 사랑하는 시기이도 합니다. 저는 시편 23편 속에서 느끼게 되는 다윗의 마음을 봅니다. 바로 만족의 삶입니다. 내 환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들을 보며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함께 하심이 모든 것의 근본임을 깨달은 삶,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는 삶, 그것이 진정한 성도들에게 풍성한 삶일 것입니다. 더 가지고 싶으십니까? 좋습니다. 가지려고 부단히 노력하십시오. 어쩜 빼앗으려고도 하십시오. 세상적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말입니다. 그것만 있으면 됐다고 생각하십시오. ‘만족이것만이 하나님을 즐기고 내 삶이 기쁠 수 있는 정말 소중한 마음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번 한 주간도 비록 내 삶의 어려운 문제가 여기저기서 발생하고 나를 힘들고 어렵게 만들지라도, 한번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문제의 답이 보이게 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