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창세기 49:28-33)

오비도제일장로교회 2020. 5. 7. 10:55

마지막이 아름다운 사람

(창세기 49:28-33)

 

요즘 인터넷에 젊은이들 사이에서 관심을 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가을을 뜻하는 고사성어 가운데 천고마비(天高馬肥)라는 사자성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말의 뜻은 한자어 그대로 풀이해서 하늘은 높고 (푸르고) 말이 살찐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의 뜻에 의해 가을의 풍성함을 나타낼 때 우리는 가을을 일컬어 천고마비의 계절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이 말의 뜻과는 다르게 이 말이 유래된 이야기를 살펴보면 조금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천고마비라는 말의 유래는 중국의 과거 은()나라 때부터 중국 북방에 나타나기 시작한 흉노족(匈奴族)이 거의 2천 년 동안 중국의 각 왕조나 백성들을 괴롭힌 역사속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합니다. 이 흉노족이 몽골족이라는 견해를 가진 학자들도 있고 우리 대한민족의 조상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지만 확실하게 정의내려진 것은 없습니다.

 

단지 이들이 척박한 초원를 생활 근거지로 하여 유목 생활을 하였고 그들의 가장 강점은 말에 의한 기동력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을 중심으로 한 기병(騎兵)이 강하였고 그 기동력을 십분 발휘해 바람같이 국경을 넘어 들어와 중국 북변 일대를 휘저으며 약탈을 자행하고는 다시 바람처럼 달아나곤 했다고 합니다.

 

특히 겨울을 무사히 넘기기 위해선 그들에게 필요한 식량 조달을 위해 농경 생활을 하고 있는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한 약탈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흉노족들의 침략시기인 추수시기, 즉 ‘하늘은 높아 푸르고 말이 살찔(천고마비) 때인 이 때가 가장 두려워!'라는 말에서 이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이 고사성어의 유래는 좀 슬프지만 어째거나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을 맞이하였습니다. 또 이 맘때가 되면 우리는 시기적으로 추석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달 말에도 한국에서는 추석연휴가 들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한국은 추석과 같은 명절이 되면 민족 대 이동이라 불릴 만큼 나라 전체가 이동을 하게 됩니다. 추석이 되면 고향길의 대명사인 고속도로도 생각하실 겁입니다. 그리고 고속도로하면 잊을 수 없는 것이  휴게소입니다.

 

그런데 이 고속도로 휴게소나 혹은 지하철, 공공장소의 화장실에 가면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글귀가 하나 있습니다.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다같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이 말은 우리나라의 낙후된 화장실을 세계적인 화장실로 개선하고자 만들었던 홍보문구입니다. 우리나라도 1990년대만 하더라도 화장실 문화가 그리 좋지는 않았습니다. 지금처럼 좋아진 것이 불과 10여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화장실 문화를 바꾸고자 캠페인을 많이 했습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쉽게 볼 수 있었던 글이 바로 저 글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이 말이 강조하는 것은 화장실을 깨끗이 사용하자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깊게 해 보면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주는 말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머문 자리의 중요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라는 이 말은 또 어떤 면에서는 역설적인 표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떠난 자리를 우리는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머물다 간 자리에 대해 우리 스스로는 평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남긴 흔적은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떠난 이 자리에 대해 누군가가 평가를 하게 된다면 어떻게 평가할 것이라고 생각라는 것을 말입니다.

 

오늘 예배가 끝나면 우리는 우리가 머문 자리를 떠나 각자 자신들의 자리로 각자의 위치로 돌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 하루를 살면서 얼마나 자주 우리가 머물다 떠난 자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니까? 비록 우리는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지나왔던 우리의 자리를 되돌아 볼 수는 없지만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이들은 우리가 머물다간 흔적을 이야기한다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어느 덧 9월달을 맞이하였습니다. 말씀 서두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벌써 결실의 계절을 맞이하였습니다. 2015년도의 4분의 3이 지나 가고 있습니다. 시편 90편에는 우리의 시간이 날아간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시간이 시작과 동시에 끝을 향해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살같이 지나가는 시간들 속에서 우리가 깨닫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라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만남이 그렇습니다. 언젠가는 그 만남의 끝이 있습니다. 부부의 만남도 언젠가는 끝이 납니다(, 소망대학). 자식과의 만남도 언젠가는 끝이 옵니다(, 대학보낸 자식을 둔 집사님). 친구와의 만남도 그렇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쓰는 물건들 가운데 영원히 쓸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 시계) 하나도 없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언제가 마지막이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아침 우리가 씻으면서 흘려보낸 물도 다시는 돌아오거나 만날 수 없습니다. 지금 지나가 버린 것들은 다시 만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이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영국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Present is PRESENT!”

 

지금 이 순간이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소중한 선물인 것입니다.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가장 소중한 사람인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가장 소중한 일입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자리가 가장 소중한 자리입니다. 내가 떠나서는 안 되는 자리인 것입니다. 옆에 있는 분들 인사하겠습니다.

 

 “당신의 옆에 앉게 된 것이 가문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젠가 떠나야만 하는 자리, 우리가 있었던 자리, 우리가 머문 자리가 아름다워야만 합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내가 있던 가정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내가 일했던 직장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내가 섬겼던 교회가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마지막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그러나 그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비단 성경속에 나오는 성경인물 가운데서도 마지막이 아름다웠던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성경은 성경속의 인물들의 마지막을 기록하기를 꺼려하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자신들의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경우가 많지 않아서였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시는 성경인물 가운데 그 인물의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인물들이 몇명이나 되십니까? 곰곰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저와 여러분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그 인물이 한창 전성기였을 때의 일들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인물들의 말년을 기억하고 계신 분들은 그리 많지 않으시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성경은 마지막이 아름다웠던 한 인물을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야곱입니다. 근데 의외로 사람들은 야곱의 삶을 제대로 기억하지도 알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야곱에 대한 생각은 그의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그의 아버지인 이삭보다도 좋지 못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야곱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우리는 인간 파렴치로 생각합니다. 아주 비열하고 못된 인물로 생각합니다. 쉽게 야곱을 평가절하하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총 50장 가운데 야곱의 이야기가 25장부터 시작해서 50장까지 나옵니다. 거진 창세기의 반을 할례해서 말합니다. 이 말이 무슨 의미입니까? 야곱이 중요한 인물이다 ? 아니다? 중요한 인물이라는 말입니다.

 

성경의 그 누구보다도 할아버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보다도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인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의 마지막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마지막을 가진 인물로 기록하고 있음도 보게 됩니다.

 

성경 창세기 50 1-5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1 요셉이 아비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2 그 수종 의사에게 명하여 향 재료로 아비의 몸에 넣게 하매 의사가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3 사십일이 걸렸으니 향 재료를 넣는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4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청컨대 바로의 귀에 고하기를 

5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서 둔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창세기 50장 전반부는 야곱의 아들 요셉이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치르는 장면입니다. 근데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야곱 한 사람을 위해서 애굽 사람들이 칠십일 동안 울었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민족도 아니고 이방사람인데 그것도 잘 아는 사람도 아닌데 애굽 사람들이 이방사람인 야곱을 위해 70일을 울었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이야기입니까?

 

일년 전 우리는 300여명의 학생이 한 선장의 잘못과 정부의 어처구니 없는 대처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사고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사고가 어떤 사고인지 아실 것입니다. 여기 계시는 성도님들 가운데 이 사고 소식을 들으시면서 몇 분이나 우셨습니까? 남을 위해서 울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과의 웬만한 친밀성이 아니면 쉽지 않습니다.

 

이곳에 계시는 여러분 가운데서는 자신이 죽으면 울어줄 사람이 있으십니까? 만약 있다면 몇 명이나 있으십니까? 그리고 그 사람들이 70일 이상을 슬퍼해 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야곱의 마지막을 보면서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생각해 봅니다.

 

6부터 다시 보겠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6 바로가 가로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비를 장사하라 

7 요셉이 자기 아비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장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장로와 

8 요셉의 온 집과 그 형제들과 그 아비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떼와 소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9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뭐라고 그럽니까? 야곱 한 사람의 장례를 위해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장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장로와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떼가 심히 컸다라고 말합니다. 정말 웅장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미국 땅에서 야곱과 같은 이민자의 삶을 살다 갈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이 땅에서 죽음을 맞이 할 때 미국 백악관의 정치인들이 미국 중요 인물들이 우리의 장례를 위해 참여해 주겠습니까? 이것만 봐도 우리는 야곱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야곱의 인물됨이 못된 성품이었다느니 거짓말하고 속임을 잘 했다느니 그런 근거없는 이야기로 야곱을 나보다 못한 인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 인물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인물이 야곱입니다. 왜냐하면 야곱과 같은 말년을 맞이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야곱과 같이 끝이, 마지막이 아름다운 사람이길 원하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살다가 주님 앞에 야곱과 같이 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야곱은 마지막을 아름다운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을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마지막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축복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성경 49장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야곱의 축복을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연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다른 이들을 축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야곱은 그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사랑하는 자신의 아들을 일일이 축복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49 28을 보겠습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십 이 지파라 이와 같이 그 아비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되 곧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십니까? 원망과 불평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축복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또한 야곱은 마지막까지 하나님을 놓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창세기 49 33의 말씀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

 

그런데 우리가 읽은 성경은 개역한글판입니다. 이 개역한글판 번역은 덜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즘 한국에서 쓰는 개역개정판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개역한글판과 개역개정판의 차이가 보이십니까? 야곱의 마지막 숨을 거두는 장면이 아주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가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 그의 발을 가지런히 모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야곱은 이 세상이 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마지막 호흡 후, 지난 자신의 순례자의 인생 147년을 마무리한 뒤, 그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면 그가 그토록 바라던 주님 앞에 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죽는 순간 그런 마음이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33절의 말씀 가운데 그 발을 침상에 모았다라는 말은 그 발끝을 가지런히 모았다는 의미입니다. 군대에서 상관이나 지휘관 앞에 설 때 차렷자세를 취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상관앞에서 차렷자세를 취할 때는 반드시 두 발끝을 모으고 꼿꼿하게 서야만 합니다.

 

야곱의 모습이 마치 전장터에서 싸움을 끝내고 부대로 복귀한 군인이 지휘관 앞에서 경과보고를 하기 위해 서 있는 모습을 연상케 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우리 주님 앞에 섰을 때 당당하게 차렷자세로 경례를 하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야곱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언젠가 우리 인생의 끝자락인 마지막에 서게 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때 여러분은 야곱과 같이 발끝을 모으고 주님 앞에 설 준비가 되셨습니까? 야곱과 같은 아름다운 마지막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야곱과 같이 죽는 그 순간까지도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서길 간절하게 원하기 때문입니다.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하게 살게 하소서

하나님 나의 마음 만져 주소서

하나님 나의 영혼 새롭게 하소서

 

모쪼록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머문 자리가 아름다울 수 있도록 지난 긴 여름날의 흐트러진 우리의 신앙의 옷깃을 다시 저미는 새로운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