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5:7-26(예수는 누구신가)
예수는 누구신가?
(누가복음 5장 17-26절)
기독교는 구원종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기독교의 근본사상과 가르침이 구원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그 구원의 대상은 누구이겠습니까? 바로 기독교를 신앙의 가치관으로 믿는 자들의 구원을 말합니다.
성경은 인간이 반드시 구원받아야만 하는 존재가 되었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이 처음 창조될 때부터 구원받아야만 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라는 말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기를 작성하셨을 때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삼아 그 백성과 교제하시고, 장차 그 백성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시고자, 자신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또한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그냥 만드신 것이 아니라 그의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으로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처음부터 영생할 수 있는 존재로, 뭐 하나 부족하지 않게, 어떠한 모자람도 없이, 어떤 피조물보다도 뛰어난 존재로 만들어 졌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렇게 만들어졌었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시편 8편 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창조세계를 탐구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온 천하에 들어내고, 장차 하나님의 백성들을 이루어 창조주 하나님만을 예배하며 섬기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그 만드신 인간을 자신의 백성을 삼으시기 위해, 그 인간과 약정을 맺으셨습니다. 그 약정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백성되게 하는 약정이었습니다.
그 약정의 내용은 인간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섬기고 경배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됨으로 영원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지만, 만약 하나님 백성되기를 거역하고 그 약정을 파기하면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않게 함으로, 또한 그 명령을 지키는 것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죽지 않고 살게 됨을 약정하셨습니다. 즉 선악과의 열매를 먹지 않음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기에 선이 됨으로 영생을 지속적으로 보장받게 되는 것이나, 만약 금하신 나무의 열매를 먹게 되면 하나님의 명령에 반역하는 행위가 됨으로 악이 됨으로 죽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인류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그 어떤 것도 부족함없이 다 받아서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굳이 창조주 하나님께서 금하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인류의 유혹자 사탄은 인간의 교만과 불순종의 마음을 부추겼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며 사는 것이 인간들 보기에 별로 좋지 않은 것처럼 느끼게 한 것입니다. 사탄은 선악의 판단과 기준을 굳이 하나님만이 하실 필요가 있느냐는 의문을 사람에게 집어 넣었습니다. 또한 인간 스스로가 선악을 판단하게 함으로써 더 이상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는 것이 더 자유롭고 낫지 않겠냐고 유혹하였습니다.
그런 뱀의 유혹과 더불어,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정녕 죽는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게 됨으로, 결국 하나님께서 금하신 명령을 반역하여 영원히 죽어 지옥형벌을 받게 돼 버렸습니다.
인류 최초의 인간들이 신약성경 요한복음 3장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믿음으로 구원얻게 된다’는 사실을 무시했기 때문에 멸망(죽음)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도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었다면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 불순종을 택했던 인간들은 자신들이 더 자유로워지고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또한 선악을 선택할 수 있는 주체자가 됨으로 자유인이 될 것이라 생각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죄가 됨으로 죄의 종이 되는 엄청난 비극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자격마저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비록 인간이 죄를 지음으로 스스로 하나님 백성되기를 버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들로 하나님 백성 삼아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시겠다는 약속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죄인된 인간을 다시 하나님 백성으로 회복하시고자 작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죄로 죽음에 이르게 된 인간을 그냥 대가없이 원상태로 회복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죄는 반드시 징벌하셔야 하는 것이 그 분만의 고유한 속성, 즉 하나님의 성품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은 인간의 죄값을 해결하고 나서야 하나님 백성으로 다시 삼으실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그 죄에 대한 값을 인간이 치루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인간을 사랑하신 하나님은 그 죄값 마저도 인간이 치르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사형 선고를 받은 죄인이 그 죄값을 치루는 방법은 오직 죽음으로 밖에는 할 수 없는데, 그 인간이 죄의 값을 지불하기 위해 죽게 되면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할 수 없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은 특단의 조치를 취하셨습니다.
바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그 인간을 직접 창조하신 성자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이 되심으로 죄인된 인간을 대신하여 그 죄 값을 치르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그리스도의 대속’이라 말합니다.
다시 말해, 창조주 하나님이자 성자 하나님께서 구속주 하나님이 되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성자 하나님께서 구속주 하나님이 되신 성육신 사건이라 말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참 신이시자 참 인간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께서 인간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구속주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그 성자 하나님께서 구속주 하나님이 되심으로, 우리의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으시기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고 성경은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에 예수만이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어떻게 예수께서 죄사함의 권세를 가지시는가에 대한 논쟁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은 예수가 누구신지를 우리에게 알리고,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선포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5장 18-19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방금 읽었던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어느 마을, 정확히는 가버나움 지역에 있는 어느 한 집에서 복음을 전하고 계셨습니다. 그 집에는 예수님의 소문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역에 살던 한 중풍병자 역시, 예수님께서 자신의 마을에 오셨고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집에 계신다는 소문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중풍병자가 언제부터 그 병에 걸렸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그 병에 걸린지는 얼마 안 되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또한 그 중풍병자의 마음에 어떻게, 무슨 이유로 예수님께만 가면 고침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는지는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예수님께로 가면 고침받을 수 있다는 강렬한 믿음이 그에게 생겼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가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은 우리 주님의 놀라운 섭리와 은혜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기적을 일으키실 때는, 믿음을 통하여 기적을 베푸시기 때문에 그 당사자에게 믿음도 선물로 주어 기적을 일으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믿고 싶어도 주님께서 그 맘을 열어주시고 믿음을 주시지 않으시면 믿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여하튼 오늘 본문의 이 중풍병자는 중풍에 걸린 탓에 혼자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 중풍병자는 믿음은 있었지만, 믿음과 별개로 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중풍병자의 마음을 주께서 아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친구들의 마음을 움직이셨습니다. 평소 그를 아끼고 사랑했던 친구들도 예수께서 기적을 베푸시고 각종 병든 자들을 고치신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중풍병자와 같이 자신의 친구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가면 예수님께서 고쳐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이란 단순한 지식이나 내가 믿고 싶어하는 신념, 확신, 찬동을 말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무턱대고 믿어보는 맹신은 더 더욱 아닙니다.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을 확실히 알고 믿어지게 되는 것을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믿는 것이 아니라, 믿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그 중풍병자와 중풍병자를 데리고 왔던 친구들도, 그들 모두에게는 확실한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예수님이라면 반드시 이 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중풍병자의 친구들과 그 병자 자신에게 동일하게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로 인해 그들의 길이 막혔을 때, 포기한 것이 아니라 지붕을 뚫었던 것입니다.
물론,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용납할 일이 아닙니다. 아마 이 일 후에 이 중풍병자나 친구들은 그 집에 대한 배상을 충실히 했을 것입니다. 또한 지붕을 뚫을 때 그 밑에 있었던 이들 가운데서도 피해를 본 사람이 있다면 보상을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믿는 자로써의 당연한 도리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 중풍병자와 친구들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교훈이 무엇입니까? 문제해결의 열쇠를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다면 우린 어떤 상황에서라도 그 분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길이 오직 예수님께만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희생한다 하더라도 예수를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어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만 붙잡아야 합니다. 지금 현재 우리의 상황이 그런 것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를 보시고 또 말씀하십니다. 20절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저희의 무엇을 보셨다고 하십니까? ‘믿음’을 보셨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기적을 일으키는 바탕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믿음’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자들은 무엇으로 사는 사람들입니까?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예수가 우리의 구원자되심을, 예수가 우리 삶의 주인이심을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의 신앙고백이요. 우리를 천국을 인도하는 구원의 통로입니다. 또한 이 믿음으로 우리는 죄사함을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예수님께서 저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냥 ‘고쳐주시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죄를 용서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내용을 시간적 순서로 따져보면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쳐주심은 ‘죄사함의 선포’ 이후에 일으키신 기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오늘 말씀의 핵심이 예수님의 기적에 목적이 있다면, 굳이 불필요해 보이는 예수님의 말씀인 ‘네가 죄사함을 받았다’라는 말씀을 하시지 말고 그냥 고쳐주시면 그것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에 감탄할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병자를 고쳐주시기 전에 ‘죄사함의 선포’를 먼저 하심을 통해, 성경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기적을 일으키시고 우리의 삶과 환경을 윤택하고 개선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시고 복되게 하지 않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복의 근원되신 그분을 믿음으로 우리는 하늘의 모든 좋은 신령한 복들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조금 더 알아가고 신앙생활의 연륜이 깊어지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방향으로 우리의 모습이 바뀌어야 합니다.
오늘 날 기독교의 변질이 어디서 일어난 것입니까? 순서가 바뀌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분이 이 땅에 오신 참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고 그것을 믿음으로 신앙해야 하는데, 그 뒤에 따라오는 부수적인 것에 너무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제가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성경은 분명히 인간은 죄인이 되었다고 선포합니다. 그래서 그 인간은 구원받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 구원받아야 할 죄인이 누구입니까? 저와 여러분입니다. 우리가 죄인이기에 구원부터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죄인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무엇이 선행되어야 합니까? 죄사함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칭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죄인된 우리가 죄용서함 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오늘 말씀은 말하고 있습니까? ‘믿음’입니다. 무슨 믿음입니까?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고 용서해 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는 믿음입니다.
여하튼 지금까지 이 상황을 쭉 지켜보고 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갑자기 극렬하게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21절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지금 저들이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보고 참람하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저주하는 말합니다. ‘참람’이라는 말은 신성모독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신성모독을 했다는 것은 자신들이 믿는 유일신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니 예수님을 죽여야 한다는 말입니다.
왜 예수님이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 그들이 믿는 유일신 사상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 한분 밖에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한다고 하심으로, 이 말이 유일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신성모독죄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논을 아셨던 주님께서 그들에게 자신들이 믿고 있는 유일신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고 선포하시는 말씀이 23-24절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 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3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죄사함을 받았다라는 말과 진짜 병든 자를 고치는 것 중에 어느 것이 더 쉬운 일이겠습니까? 당연히 말로 하는 것이 쉽습니다. 더욱이 말로 니 죄가 사했다고 해서 진짜 그 죄가 용서함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 우리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말로는 아무거나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병든 자를 고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일반적인 어떤 질병을 고치려고 해도 아무나 무턱대고 그 병을 고치겠다고 덤벼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그 병에 대해서 연구하고 그 분야에 수많은 경험을 쌓은 사람만이 의사가 되어 환자를 고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눈에도 보이지 않는 이 작은 바이러스 하나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수많은 세계적인 석학들이 이 해결책에 매달려 있지 않습니까? 하물며 병든 자를 어떤 의학지식이 없는 이가 고친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뿐더러, 말도 안 되는 일일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현대 의학이 고칠 수 없는 병을 고친다면 그것은 분명 특별한 능력을 가졌거나 보통 사람과는 현격히 다름을 나타내는 증거일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이 하지 못하는 기적을 일으킴을 통해, 중풍병자를 고치심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들어내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1:2-6 강해)
그래서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를 치료하심을 통해 무엇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까? 인간의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누구에게만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고자 하시는 것입니까? 오직 예수님께만 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말한 것처럼 죄를 사하는 권세가 오직 하나님께만 있듯이, 예수님 자신이 바로 죄를 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제가 설교 서두에서 말씀을 드린 대로 ‘죄사함’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회복하시는 방법이십니다. 이 죄사함이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죄사함을 이루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인간으로 오셨고 우리를 위해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건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첫째,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일으킬 수 없는 기적을 일으키시는 분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기적으로 고치심으로써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하셨습니다.
둘째,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입니다.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죄를 사하시는 권세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만 있다는 것입니다.
혹여 우리 가운데 죄로 인해 불안해하며 떨고 있는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께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분은 자기에게로 오는 어느 누구도 거절치 아니하시고 받아주시는 사랑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또한 그 분께 가서 죄를 자복하면 능히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마지막 세 번째,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중풍병자가 자신의 절망적인 상황을 넘어 고침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이유가 없었습니다. 자신이 비록 절망가운데 있어지만 예수님이라면 반드시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구원받은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예수 믿으면 우리의 문제 해결받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우리 문제의 해답이십니다. 그 어떤 문제도 우리가 가진 것으로는 우리 인생의 구원과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붙들고 의지할 때 우리의 문제가 해결받을 줄 믿습니다.
코로나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 수록 예수님이 누구신지 확실히 알고 믿음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에 부착되어 계시는 모든 성도들이 다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