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4:22-33(물위를 걸으신 예수님)
물위를 걸으신 예수님
(마태복음 14:22~33)
한국에서 청년부 사역을 할 때였습니다. 여름 수련회가 되면 각 부서 수련회 장소를 잡는 것부터 해서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것이 수련회 강사를 미리 알아보고 초청하는 것이었습니다. 웬만한 유명한 강사들은 이미 2년 전부터 스케줄이 다 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구할 수가 없습니다.
여하튼 어렵게 강사를 구하고 수련회를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은혜 가운데 수련회가 끝난 후 강사를 모시고 식사대접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강사분께서 맛있게 하는 짜장면집에 가서 짜장면을 드시고 싶다고 하셔서 교회 근처에 있는 이름난 중식집을 찾아갔습니다. 저와 강사 목사님 그리고 청년부 부장 장로님 3명이 함께 갔습니다.
저희가 찾아간 중식집은 장소는 비록 작았지만 맛은 일품인 식당이었습니다. 자리에 앉고 주문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이내 주문을 받으러 아주머니께서 오셨습니다. 거기에 있던 저희는 각자가 주문을 했습니다. 저는 짬뽕, 강사님은 짜장, 부장 장로님도 짜장, 그리고 군만두 하나, 주문을 받은 아주머니께서는 주방을 향해서 외쳤습니다. "짬짜짜, 군만두 하나." 아주머니의 오더(Order) 넣는 방식이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날은 그런가 보다하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몇 주후 청년부 리더들과 함께 그 중국집을 다시 찾았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6명이었습니다. 남자 넷, 여자 둘, 그리고 각자가 음식을 주문했습니다. 세명은 짜장, 세명은 짬뽕, 그리고 탕수육 두개, 이 주문을 받은 아주머니께서는 주방을 향해 또 외쳤습니다. "짬짜짬짜짬짜, 탕 둘"
아주머니께서 오더(Order)넣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다음엔 청년부 팀장들을 다 모았습니다. 15명 정도 모였습니다. 그리고 청년들과 함께 작전을 짰습니다. 만약 주문을 각자 다른 메뉴로 한다면 아주머니께서 어떻게 오더(Order)를 넣는지 지켜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문을 받으러 오신 아주머니에게 각자가 다른 메뉴를 주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짜장면, 짬뽕, 볶음밥, 오무라이스, 울면, 팔보채, 탕수육, 야끼우동, 잡채밥, 군만두 등등. 정확히 15개의 다른 음식을 주문했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은 숨죽여 아주머니께서 주방을 향해 뭐라고 외치는지 귀를 기울였습니다. 주문을 다 받아 적은 아주머니께서 주방을 향해 외쳤습니다. "너 다 알지!"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이렇습니다. 이미 여러분께서는 다 알고 계시는 내용일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교회를 그래도 좀 다녔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지난 주 오병이어의 말씀과 더불어 오늘 본문의 말씀인 물위를 걸으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귀가 따갑도록 듣는 말씀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만 이 말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해하고 계시는 분들은 그리 많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오늘날 이 본문을 이야기하는 설교자들이나 오늘 본문을 읽고 묵상하는 성도들이 말하고 기억하는 것은 그저 물 위를 걸어오신 예수님과 물 위를 걷게 된 베드로를 보면서 베드로가 물 위를 걸은 기적이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우리도 믿기만 하면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은 기적을 우리 삶속에서 맛볼 수 있다고 말입니다.
심지어 어떤 분들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내용 가운데 베드로가 풍랑을 보고 무서워 할 때 바다에 빠지게 된 것을 말씀하면서 세상 풍파를 보고 두려워 해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세상 것을 보고 두려워 하다가는 바다에 빠지게 된다고, 그래서 우리 주님만 바라봐야 산다는 식의 말씀을 합니다. 물론 이렇게 말씀해도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정말 마태복음을 쓴 마태는 과연 이런 유의 이야기를 하고자 그 비싼 종이 위에 베드로가 물위를 걷게 된 기적을 적었을까하는 겁니다. 지난 번에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행하신 오병이어의 사건은 그저 보잘 것 없는 보리떡 5개와 작은 물고기 2마리로 5,000여명을 먹인 기적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 것처럼 마치 어떤 사람들이 믿음으로 기도하면 우리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고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식의 기복적인 신앙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세례요한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본질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의심과 질문을 가져야만 하고 그 의심과 질문의 대한 답으로 오병이어를 일으키신 예수님이 바로 그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하려는 것과 같은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예수님이 진짜 하나님이신가에 대해서, 왜 예수님이 우리의 구세주이신지에 대해 질문을 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나는 한번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나의 구세주이심을 의심한 적이 없다고 말씀하신다면, 죄송한 말씀이지만, 거짓말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쩜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에 의심할 이유도 없었는지 모릅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의 구세주로 예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었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반드시 한번 이상은 예수님을 의심하게 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신앙과 믿음이 너무 좋기 때문에 한번도 의심이 안 된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속신앙적인 예수신을 믿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구세주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으신다면 갈등이 되어져야 합니다. 어떤 복음송 가사의 내용처럼 "정녕 그 분이 내 형제 구원했나? 나의 영혼도 구원하려나? 의심많은 도마처럼 물었네. 내가 주를 처음 만난 날"
내가 처음 주를 만났을 때 외롭고도 쓸쓸한 모습
말없이 홀로 걸어가신 길은 영광을 다 버린 나그네
정녕 그분이 내 형제 구원했나 나의 영혼도 구원하려나
의심 많은 도마처럼 물었네 내가 주를 처음 만난날
내가 주를 처음 만난 날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합니까? 의심많은 도마처럼 물었다고 합니다. 정말 내가 구원받은 것이 맞나? 예수님이 정말 구세주이신 것이 맞나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정말 예수님이 구세주이신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몸서리치듯 몸서리쳐져야 합니다. 그 시간이 있어야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없이 교회를 다니고 있고 예수님을 믿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신을 믿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내가 천국 갈 수 있는 믿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뇌당해서 그저 내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만났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마태와 마가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똑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과 요한복음에 없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베드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의 중요한 의미는 바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속에서 찾을 때 오늘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가와 요한복음에는 베드로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마태는 분명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를 통해서 마태가 말하고자 하는 메세지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말씀이 평소 내가 들었던 내용과 어떻게 다른 지를 살펴 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오병이어의 사건이 있고 난 직 후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족히 2만명 이상을 먹이신 이후, 오병이어의 사건을 일으키신 디베랴 지역을 떠나, 제자들을 먼저 배에 태워 벳새다로 보내셨습니다. 디베랴에서 벳새다까지는 약 7마일 정도의 거리(저희 집에서 교회까지 거리)였습니다. 배로 약 2시간 정도의 거리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그날 따라 역풍이 불어서 배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출발한 시간이 저녁 8시 정도였는데,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새벽 3~5시까지 역풍 때문에 약 0.5마일 정도 가서 발이 묶여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 예수님께서 역풍으로 고난당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 착각한 것입니다.
26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그리고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27절의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그리고 나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가 나옵니다. 28절의 말씀부터 다시 보겠습니다.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여기서 이렇게 이야기가 끝이 나는가 싶었는데 33절에서 뭔가 중요한 말씀을 남깁니다. 33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33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뭐라고 말씀합니까?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절한다'라는 말은 신적인 존재에게 경배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고백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을 신적인 존재로 경배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근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마태복음 16장 16절에서 베드로가 처음으로 고백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은 오늘 이 사건 이후 제자들이 함께 고백을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고백보다 한 참 전에 이미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이 14장 오늘 본문 이전까지 그 누구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지 않았는데 그 반면, 사탄과 마귀는 마태복음 8장에서 이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것을 보면 오늘 본문의 사건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 어느 누구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 사건을 본 예수님의 제자들의 고백이 무엇이었느냐가 오늘 본문의 핵심이 되는 것입니다.
물 위를 걸어 오셨기 때문에 그리고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기 때문에 우리도 믿음으로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기도하면 된다고, 예수님만 바라보면 된다라는 식의 설교는 사실 기복적인 설교이며 성도들을 주술적으로 몰아가는 설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물 위를 걸으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은 우리에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말씀해 주는 내용임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주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가 왜 중요한 것이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지난 시간 오병이어의 사건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께서 장차 오실 제2의 모세라는 것, 즉 메시야 구세주이심을 확인해 보았습니다. 오병이어가 말하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예수님이 구약의 모세가 예언한 바로 그 메시야임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이 본문은 또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혹시 출애굽기 14장의 내용이 무엇인지 기억하십니까? 예 그렇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홍해사건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홍해이야기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설명드리겠습니다.
근데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바로 홍해 사건을 기억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니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보면서 홍해 이야기를 연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읽었던 당시 유대인들은 오늘 본문을 보는 순간 출애굽기 14장의 홍해 사건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바로 24절, 28절과 29절에 있습니다. 다시 한번 24절 말씀과 28-29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24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28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오늘 이 장면이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는 형상과 비슷함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24절에 있는 말씀 가운데, '배가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라는 장면은 홍해가 갈라질 때 밤새도록 동풍이 불어 거센 바람이 바다를 가르는 장면을 연상케 합니다.
또한 베드로가 예수님께 물 위를 걸어 오시도록 청했을 때 예수님께서 오라고 하시는 모습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홍해를 건너게 하시는 장면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은 모습과 물에 빠진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구해 주신 장면은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에 빠져(?) 바닥을 밟고 걸어가는 모습과도 같습니다.
오늘 이 장면을 통해서 마태는 이 글을 읽는 유대인들에게 물 위를 걸으시고 또한 베드로를 물 위로 걷게 하신 그 분이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에서 구원하여 내신 하나님이시다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증명하는 성경구절이 27절에 나옵니다. 27절을 함께 보시겠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여기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가르켜 이렇게 말합니다. "내니(나다)" 우리 한글성경에는 크게 그 의미가 들어나지 않지만 이것을 헬라어로 읽으면 의미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무슨 의미냐하면 헬라어로 '내니'라고 할 때, “Ego Eimi”라고 말합니다. 근데, 이 “Ego Eimi”라는 말은 출애굽기 3장 14절에서 모세가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묻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말해 주십니다. 뭐라고 하시냐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가르켜서 한 이름이 바로 “나다”라는 말입니다. 즉 영어성경에는 "I AM WHO I AM"으로 말하고 있는 이 말이 최초의 구약성경이라고 할 수 있는 헬라어로 쓰여진 70인역에서 “Ego Eimi” 번역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마태복음 본문을 읽게 되는 유대인들은 오늘 본문 27절에서 '안심하라 내니'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와는 사뭇 다른 뉘앙스로 들려진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들리게 된다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을 말씀하실 때, Ego Eimi라는 말이 출애굽할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로부터 그리고 홍해에서 구원해 내신 구원자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듣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30절에서 말합니다.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구원해 달라는 베드로를 보고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구원해 주십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 홍해에서 즉시 구원해 주신 것과 같이 말입니다. 출애굽기 14장을 잘 살펴보면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순식간에 건넌 것처럼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때마침 그 일이 일어난 시간이 '새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도 새벽에 일어난 일입니다.
이러한 일련에 내용을 통해 마태가 오늘 본문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구원자되시는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진정한 구원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예수님 외에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참된 구세주가 되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33절에서 사람들이 고백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31절에서 베드로를 향해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말씀하십니까? 그리고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을 내겠습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메시야이십니다. 이 말은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이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라는 것입니다.
돈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좀 더 일하고 좀 더 노력해서 돈을 더 많이 얻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직장을 가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 사업장의 형편이 더 나아지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먼저 우선순위를 결정한 삶이 되지 않으면 아무리 쉽게 해결될 것 같은 문제도 쉽게 해결 안됩니다. 이것만 해결하면 다 될 것 같은 일도 그 일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에 빠져 듭니다. 뭐를 해도 늘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답을 먼저 찾아야 문제가 해결됩니다. 질병도 마찬가집니다. 물론 의사의 손을 빌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먼저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 되심을 고백하는 고백이 있어야 상황이 달라져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자녀문제, 남편문제, 아내문제, 내 가족 문제, 사업장, 학교, 교회, 여러분이 속해 있는 그 어떤 곳의 문제들, 다 예수님 안에 해결책이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십시오. 예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인정하십시오. 물론, 저와 여러분이 인정한다고 해서 그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되고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안 되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의 인정과 상관없이 그 분은 구세주이시며, 그분은 하나님이시며 그분만이 우리 인생의 문제의 해결이시며 내가 살아가는 이유, 내가 호흡하는 이유입니다. 그 분만을 높이시기 바랍니다. 그 분만을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그 분만을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고백하십니까? 나를 천국으로 인도해 주시는 분으로 믿으십니까? 이번 남은 한 주간 우리의 주인되시는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
보려고 발버둥치는 한 주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