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강해

마태복음 12:1-8(하나님의 은혜)

오비도제일장로교회 2020. 5. 6. 04:14

하나님의 은혜

(마태복음 12:1~8)

 

배가 부서지는 사고가 자주 일어나는 위험한 바닷가에 한 때 볼품 없는 작은 인명 구조 본부가 있었습니다. 건물이라고 해 봤자 초라한 오두막같은 낡고 작은 건물 한 채 뿐이었고 구명 보트도 4명이 겨우 탈 수 있는 작은 배 하나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헌신적인 몇 명의 구조대원이 끊임없이 바다를 지켰고 험한 파도 속에서 사고가 날 때마다 구조대원들은 계속해서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였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이 구조 본부의 소식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되었고 조금씩 이 구조본부는 사람들로부터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구조된 사람들과 주변 사람들 가운데서 자발적으로 구조 대원으로 봉사하겠다고 나선 사람들도 많았고 구조 대원들의 활동비를 지원해 주는 사람들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점차 이 인명구조 본부는 구명 보트도 새로 구입하게 되었고 구조 대원들도 늘어나는 등 작은 구조 본부가 점점 커져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지고 본부가 커지자 새로 가입한 회원들 중 어떤 사람들은 볼품 없는 낡은 건물과 시설에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조된 사람들의 임시 피난처가 되기 위해서라도 좀 더 편안한 시설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비상용 간이 침대를 훌륭하고 편안한 침대로 바꾸었고 건물도 확장 보수하고 좀 더 좋고 편안한 가구들을 갖다 놓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구조대원들이 대기하는 동안 시간을 즐겁게 보내기 위해서 간단한 운동 기구들과 장기, 바둑 등 오락 시설도 갖추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되자 이 인명구조본부는 점차 회원들을 위한 대중적인 모임장소가 되어 갔고 또한 일반사람들의 사교모임장소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곳을 더욱 아름답게 치장하자는 의견들이 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구조 본부 회원들의 의지로 구조본부는 화려한 외관과 시설을 갖춘 건물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마을 사람들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에서 구경차 오는 관광장소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와 함께 회원들은 인명을 구조하는 본연의 임무를 위해 위험한 바다에 나가는 일에는 점차 관심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일을 전담할 수 있는 구조대원들을 새로 채용하기로 했습니다. 시간이 더 지나자 다음 번 모인 회원들의 총회에서 불화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회원들은 구조본부의 구조활동이 별로 즐겁지도 않고 오히려 위험한 일이라는 이유를 들어 이제부터는 인명구조활동은 그만 두고 지역 주민들을 위한 사교모임으로 바꾸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회원들은 인명구조활동이야말로 이 조직 본연의 임무요 목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이 인명구조본부가 사교모임 장소로 바꾸어져서는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이런 주장은 투표 결과 무시되었고 만약 인명구조활동을 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아래편 해안에서 새로운 구조본부를 만들어 인명구조활동을 시작할 수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얼마 후 큰 태풍의 영향으로 그 지역 해안에서 큰 배의 파선 사고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사교모임으로 바껴버린 인명 구조본부는 구조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해 파선된 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까운 목숨을 잃는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이야기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는 분명하리라 생각이 됩니다. 본래의 취지가 변질되어져 버린 모임이나, 조직, 전통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성경본문의 말씀도 이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안식일날 늘 하셨던 것처럼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시기 위해 길을 가시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식사 시간을 놓쳤는지, 아니면 형편이 어려워서였는지 모르지만 배고픔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예수님과 함께 가던 길에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배가 고팠던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그 자리에서 허기진 배를 채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지켜보던 바라새인들이 예수님께 예수님의 제자들이 율법에 명한 법을 어겼다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반론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한 내용이 무엇이며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내용인 진의가 무엇인지 여러분들과 함께 찾아보길 원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1-2절의 말씀을 함께 보겠습니다.

 

1 그 무렵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셨다. 그런데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서 먹기 시작하였다.

2 바리새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바라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난한 내용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했다고 말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신명기 23 25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이웃 사람의 곡식밭에 들어가 이삭을 손으로 잘라서 먹는 것은 괜찮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면 안 됩니다."

 

모세의 율법에는 사람이 여행을 하다가 배가 고프면 남의 밭이나 논에 있는 열매를 먹는 것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에 손으로 따서 먹는 것은 허용되지만 낫을 가지고 추수하는 것만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밀밭을 지나가면서 밀을 따서 먹은 것은 불법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방한 이유는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남의 밭에 들어가 밀 이삭을 잘라 먹은 것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였냐라는 것입니다. 바로 제자들이 남의 밭에 들어가 곡식을 잘라먹은 그 날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만일 제자들이 곡식을 잘라 먹었던 날이 평일이었다면 아무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잘 지키기 위해서 율법에 없는 수많은 규정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들은 안식일에 금해야 할 일을 39가지 만들었고 또 다시 각 항목에 6가지 규정을 추가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당시 안식일에 할 수 없는 일, 즉 금지된 사항이 무려 234가지나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금지 항목 중에(3번째) 곡식을 추수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밀을 잘라 먹은 것을 추수행위로 간주하고 그들이 안식일에 추수한 것은 정확한 범법행위였다고 비난한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반론이 3-5절의 말씀에 나옵니다. 함께 보시겠습니다.

 

3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굶주렸을 때에, 다윗이 어떻게 했는지를, 너희는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4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단에 차려 놓은 빵을 먹지 않았느냐? 그것은 오직 제사장들 밖에는, 자기도 그 일행도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데 말이다.

5 또 안식일에 성전에서 제사장들이 안식일을 범해도 그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율법책에서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여기에 나오는 다윗의 이야기는 사무엘상 21:1-6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 하는 사울을 피해서 놉이라는 지역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다윗은 안식일에 제사장 아히멜렉이 섬기는 성막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때에 아히멜렉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 아히멜렉은 왕의 사위인 다윗을 정중하게 영접했습니다. 그때에 다윗은 아히멜렉에게 자신과 부하들이 오랫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고 말하고 먹을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성막에서 다윗에게 줄 떡이 없었습니다.

 

그 때에 성막에 있었던 것은 오직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떡(진설병)이었습니다. 진설병은 성소 안에 있는 떡상에 올려놓는 거룩한 떡이었습니다. 제사장들은 율법에 규정된대로 매 안식일마다 지난 주에 올려놓은 떡을 치우고 새로 만든 떡을 올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떡 상에서 치운 떡은 성소에 진설한 떡이기 때문에 제사장들만 먹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히멜렉은 다윗과 그 부하들이 매우 허기가 진 것을 보고 율법의 규례를 어기고 그 떡을 다윗에게 주었습니다. 다윗은 그 떡을 받아서 부하들과 함께 나누어 먹고 굶주림을 해결했습니다.

 

제사장들만 먹도록 규정된 진설병을 다윗에게 준 것은 분명히 율법을 어긴 일이었습니다. 만일 보통 때에 이러한 일이 일어났으면 하나님은 율법을 어긴 사람들을 징계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에 대해서 제사장들과 다윗을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날 다윗은 그 떡을 먹지 않으면 쓰러질 수 있는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다윗의 이야기를 말씀을 하신 후 바리새인들을 향해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십니다. 6-8절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6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않는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았더라면, 너희가 죄 없는 사람들을 정죄하지 않았을 것이다.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

 

오늘 마태복음 12:1-8의 말씀이 마가복음 2:23-28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 기록된 내용가운데 조금 특이한 구절이 있습니다. 함께 마가복음 226-28절을 보겠습니다.

 

26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다윗이 하나님의 집에 들어가서, 제사장들 밖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제단 빵을 먹고, 그 일행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27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28 그러므로 인자는 또한 안식일에도 주인이다."         

 

우리가 방금 전 함께 읽은 마가복음에는 마태복음에 기록되지 않는 내용이 하나 더 있습니다. 27절의 말씀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제자들을 비방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진정한 안식일의 정신을 말씀하시면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안식일 그날 자체를 지키는 것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이 주어졌을 때는 율법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감시하시기 위해서 주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인간들에게 주신 근본이유는 인간들을 위해서 그 율법을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죄인된 인간들이 더 이상 망하게 되는 멸망의 길로 가지 못하도록 율법을 주셔서 인간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표현이 사실은 율법인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율법을 주신 진정한 의미와 정신은 사라지고 율법 그 자체에 빠져서 오히려 인간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고자 주셨던 그 율법(율법의 내용은 간단합니다. 말씀대로 살면 복이고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 화가 온다는 것입니다.)이 사람들을 옥죄는 도구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그 본래 정신은 잃어버리고 쓸데없는 것에 목숨을 걸게 만들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 가운데 오늘 바리새인들이 범한 잘못을 똑같이 반복한 역사가 있었습니다. 로마 교회가 망할 때 로마도 같이 망했습니다. 로마 교회가 망할 때 로마 교회 종교지도자들이 죄를 회개하고 바르게 살려는 생각은 하지 않고 바늘 끝에 천사들이 몇 명이나 앉을 수 있는가라는 논쟁으로 3일간이나 싸웠다는 역사기록이 있습니다. 로마교회와 로마가 망하게 된 것이 어쩜 이 쓸데없는 일을 하다가 망하게 된 것이 아닌지 모릅니다.

 

러시아 교회가 부패하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에 공산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혁명이 일어나기 전에 러시아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서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배를 집례할 때 황금색 가운을 입어야 되나, 빨간색 가운을 입어야 되나 하는 것으로 일주일간이나 피터지게 싸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황금색 가운도 입지 않고 빨간색 가운도 입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가지고 싸웠습니다. 과연 러시아에서 공산 혁명이 일어난 것이 시대적 상황이 그랬다고 하기엔 어색한 변명같이 보여지는 내용입니다.

 

우리나라 어느 교단 총회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목사님들이 예배 마지막 자락에서 축도할 때축원하옵나이다라고 해야 하는지축원할지어다라고 해야 하는지를 놓고 교단적으로 싸운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 한국 교회의 부흥은 멈추기 시작했고 교회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전적인 저의 개인적인 생각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예수님의 말씀처럼 오늘날 교회안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정말 무엇인가라는 것을 함께 고민해 보자는 것입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조직화되는 것이 나쁘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교회생활을 하면서 언제부턴가 혹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없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날 우리 교회안에 정작 예배의 중요한 정신은 사라진 채, 예배의 형식에 목숨을 거는 교회가 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 자신을 살펴 보자는 것입니다. 혹여 우리는 주일의 진정한 의미를 잊은 채, 습관적으로 교회 모임에만 치중하는 모습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일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배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날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모임이 예배입니다. 주일날 모여서 예배는 어떻게 드려야 하고, 주일날은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는 고착된 사고방식에 사로 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 수 있는 최선의 방법과 최선의 노력이 있는 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함께 한 자리에 모여 예배드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결고 잊어서는 안 됩니다. 주일은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날이어야 합니다. 나 자신을 나누는 날이 아니라 지난 한 주간 내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는 날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예배도 중요하지만,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도 안 됩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이 예배가 성도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성도들이 이 예배를 위해서 존재해서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예배 참석한 숫자나 인원에 지금 마음이 쏠려 계신 분이 있으시다면 지금 여러분은 잘못된 예배를 드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특히 목회자가 실수하는 것이 이 부분입니다. 만약 우리 가운데 선포되어지는 말씀에 마음이 쏠려 있는 것이 아니라 예배와 상관없는 것에 마음을 두고 있다면 지금 저와 여러분은 잘못된 예배를 드리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또한 교회는 죄인들이 모인 공간입니다. 모두가 다 나처럼 신앙생활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조금 부족한 모습을 가진 사람들도 있고, 때로는 나와 다른 색깔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와 다르다고 해서 상대방을 비방하거나 부족하다고 욕해서서도 안 됩니다. 더욱이 정죄해서는 더 안 됩니다. 오히려 부족해도 감싸줄 수 있는 여유가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성도 스스로가 느끼기를 나같은 부족한 사람도 인정해 주는 곳이 이 교회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교회를 섬기시는 분들이 일군이 없어서, 할 수 없이 섬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일은 얼마든지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그 일 할 사람이 없다면 그 일 안 해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같이 부족한 사람도 하나님이 쓰신다는 은혜를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신학자이면서 설교가인 미국의 아이언사이드 박사라는 분이 계십니다. 이분이 교회에서 회의를 진행하고있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청년 하나가 손을 들더니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기 시작합니다. "법대로 합시다" 이 말을 듣던 아이언사이드 박사가 아주 놀라운 얘기를 했습니다.

 

"여보게 젊은이, 법대로 자네를 다루었다면 자네는 어떻게 될 것인가? 자네는 벌써 지옥에 가 있어야 마땅할 것일세." 우리는 법보다 위대한 원리에 의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은혜의 원리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께서 나를 다루신 것처럼 다른 사람을 대하겠다"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계를 지배하는 은혜의 원리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옳고 그름의 원리 - 율법적인 원리 - 가 아닌 은혜의 원리에 의해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이 순종할 수 있는 명령이 무엇입니까? "네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것입니다.

 

이번 남은 한 주간도 서로 사랑하며 사시는 한 주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사랑하지 못하시겠거든, 하나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해 주신을 것을 기억하시면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삶을 풍성하게 만드실 줄 믿습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여러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요즘 새벽기도회의 말씀이 레위기입니다. 레위기는 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법을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통해 옳고 그름의 잣대만을 말씀하려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 법을 통해 교회 안에는 은혜가 있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에게 은혜가 사라지는 날 교회는 망하게 됩니다. 또한 교회가 교회되고 예배가 예배되게 하는 것은 오직 은혜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는 순간 교회와 성도로서의 본연의 모습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교회가 교회될 수 있고 우리의 예배가 예배될 수 있으면 이 자리에 직분받은 자들이 그 직분자의 위치에 있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변화시키고 나를 지키고 나를 나되게 하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자비를 원하시지,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말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은혜가 아니었으면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정의의 잣대를 대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나를 향해 베푸셨던 그 은혜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은혜가 아니었으면 우리는 구원받을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 은혜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