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강해

출애굽기2:23-25(울어야 산다)

오비도제일장로교회 2020. 5. 6. 04:04

울어야 산다

(출애굽기 223-25)

 

우리가 방금 읽은 출애굽기 말씀은 430여년 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던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에는 손님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지만 어느 시점부터는 손님이었던 그들이 노예로 전락하게 됩니다. 여러분께서도 상상하실 수 있으시듯이 노예의 삶은 고통스럽습니다. 사람들은 고통가운데 처하게 되면 처음에는 그 고통 때문에 힘들어합니다. 그리고 그 고통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아파합니다. 하지만 이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하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왜 이 고통이 나에게 일어나게 된 것인지를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자신들의 고통이 커지면 커질 수록 그들은 왜 이런 고통가운데 자신들이 놓이게 되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발견하게 됩니다. 그 고통의 원인은 자신들의 신분이 변화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부터 노예였던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어디서 왔으며, 왜 여기 있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야하는 지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고통가운데 있던 그들이 기억하게 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신들이 잊고 있었던 조상들이 믿고 의지했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잊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집트로 이주해 와 살면서 삶에 안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삶에서 편안해 지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을 애굽땅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을 잊어 버리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고통이 닥쳐오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알게 된 것입니다. 자신들에게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자신들에게 누가 있어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23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뭐라고 그럽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이 고역으로 인해 부르짖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부르짖다라는 말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들어내면서 처절하게 울부짖는 것을 말합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하소연하는 것을 말합니다. 누가복음 181-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1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2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이스라엘 백성들이 부르짖었다라는 것은 그냥 신세한탄했다는 말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했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223절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군가에게 분명 부르짖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억울함을 호소할 대상이 누구이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아픔을 부르짖을 대상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의 인생에게 고통이 왜 주어지는 것일까요? 물론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그런데 공통된 점을 찾아 본다면, 바로 한 가지입니다. 우리의 잘못으로 인해 고통이 오든, 또한 욥기에서 보듯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고통이나 고난가운데 들어가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잘못된 우리의 신앙을 바로 잡고, 잘못된 우리의 죄를 고쳐먹고, 잘못된 우리의 길을 바로 가게 하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이라는 것을 통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MCKC연합기도회에 참석하신 성도님들께 말씀드립니다. 먼저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기도의 대상은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기도의 대상이 누군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그분을 먼저 찾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두번째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25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24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25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오늘 24-25절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3가지 동사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두번째는 어떤 분이십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기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을 기억하시는 분이십니다. 남들은 다 기억못해도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아픔을 기억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세번째는 어떤 분이십니까? “이스라엘 자손의 종살이를 보시고, 그들의 처지를 생각하셨다.” 생각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형편을 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어려운 형편과 상황을 다 아시고 살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현재 어려움 가운데 계십니까? 아픔 가운데 계십니까? 누구도 모르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형편과 고통가운데 계십니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말씀합니ㅏㄷ. 하나님은 우리가 힘든 상황 속에 놓여 있을 때, 고통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언제나 들으시고, 기억하시고, 생각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다른 사람 의지하려 하지 말고, 내 생각대로 일을 헤쳐 나가려 하지 말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무릎 꿇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소망이 있습니다.

 

오늘 24-25절 말씀에서는 기도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부르짖는 소리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권념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이방종교의 기도와 우리의 기도가 다른 점입니다.

 

이방 종교들은 자신들의 정성에 의해 자신들의 신이 감동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간절한 정성이 들어간 부르짖는 그 소리 자체가 신비한 효력을 발생시킨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교회를 다니면서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몸으로 열심히 때우면 하나님께서 감동하시겠지라고 말입니다. 물론, 그런 것이 전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절대적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선한 행동으로 일을 이루시고, 그렇지 않다고 해서 안 이루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만약 그렇게 알고 있다면 하나님을 잘 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놓여 있는 언약의 관점에서 보지 못하면 지성이면 감천식의 사고가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것은 당신이 하신 약속 때문이지 우리들의 부르짖음 때문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렇기에 기도할 때도 때를 쓰면 된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고 상고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는 소리에 하나님은 그들의 선조에게 하신 약속을 기억했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기도도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 자식간에 오고가는 당당한 요구와 응답이 쌍방의 사이가 부모와 자녀라는 절대적인 신뢰 관계에 근거하는 것과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미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나 당당하게 간구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과 우리가 절대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구축된 언약관계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주님께서 분명 우리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 역사하시겠다고 하나님은 약속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5 7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들어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신 하나님이 있기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 언약의 말씀을 잊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하도록 내 버려두신 것도 그들을 생각하고 있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께 절체절명의 마음으로 부르짖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과 자신들과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를 가르쳐 주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는 기도하면 응답하시는 관계임을 알려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25절 말씀에서 이런 말씀을 합니다.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근데 이 구절의 표현은 한글성경에서의 번역은 잊고 있었다가 생각난 것처럼 보이는데 원문의 뜻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고난을 아셨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아셨다.’라는 이 말은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이전부터 지금까지 겪어 왔던 고난을 쭉 알고 계셨다라는 말입니다. 이 표현이 방주 안에 오랫동안 갇혀 있었던 노아의 가족을 향해서 하신 말씀에도 동일하게 있습니다.

 

창세기 81절에,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라고 말씀하시는 부분에서 하나님께서는 방주 안에 있는 노아와 그와 함께 한 모든 육축들을 기억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기억했다는 것도 늘 매 순간 지켜보고 있었다라는 말씀입니다. 자식이 없어 애태우던 라헬을 향해서도 동일하게 쓰인 단어입니다.

 

즉 오랜 기다리심 가운데 약속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움직이셨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은 백성들 스스로 힘을 키워 쿠테타를 일으켜서 독립하는 하는 것으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시작점은 바로의 압제에서 더 이상은 애굽에 소망이 없음을 알고 신음하며 부르짖는 소리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비로소 그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관계속으로 들어갈 준비가 되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의 죄악을 바라보며 가슴아파하고 한탄하는 부르짖음을 듣기 원하십니다. 그래서 세상에 소망이 없음을 알고 하나님께 소원을 두고 울부짖는, 한탄하는 신음소리를 듣기 원하십니다. 그 소리가 하늘에 들릴 때까지 주님께서는 기다리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시간 함께 부르짖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서 이러한 울부짖음이 나올때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가 됩니다.

 

지금 여러분에서 울부짖어야 할 일들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기도라는 그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남을 보게 되는 기적의 때입니다. 기도하십시오. 부르짖으십시오. 이제는 울어야 할 때입니다. 울어야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