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5:1-10(예수, 나의 치료자)
예수, 나의 치료자
지난 4월부터 5월달 새벽마다 묵상하고 있는 열왕기서는 이스라엘의 여러 왕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는 책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려서 열왕기서는 왕들의 이야기를 적고 있는 책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내용을 포함해서 열왕기서에는 짧지 않은 선지자들의 이야기 또한 기록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바로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입니다.
열왕기서를 읽으면서 누구나 할 것없이 이 두 선지자에게 열광하게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이들이 일으킨 기적적인 사역때문에 그렇습니다. 마치 이들이 일으킨 기적들은 신약시대의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을 연상케 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이 두 선지자들이 행한 기적을 보면서 우리에게도 이런 능력을 달라고, 어떨 때는 엘리야와 엘리사와 같은 기도의 응답을 달라고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엘리야와 엘리사의 이야기를 읽는 내내 우리의 관심은 온통 이 두 인물에게만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이 두 선지가 일으킨 기적적인 사건들을 보면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합니다. 이 두 인물의 성격, 특성, 이 두 선지자가 어떻게 위대한 선지자가 될 수 있었는지 등등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이 두 사람 자체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입니다. 우리만 이 두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 성경은 정작 이 두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오직 이 두 사람을 통해 역사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께서 무엇을 행하셨는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두 선지자의 등장한 시기와 함께 이 두 선지자의 이름이 주는 의미가 독특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먼저 엘리야입니다. 엘리야의 이름이 무슨 뜻입니까? 엘리야는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 또는 ‘여호와가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왜 하필 아합시대에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다’라는 이름을 가진 선지자가 등장했을까요?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누어지기 전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우상숭배란 어떤 형태였는지 아십니까? 기꺼해야 왜곡된 하나님을 섬기는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출애굽시기나 가나안 정복시대, 그리고 사사시대에도 우상숭배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남과 북으로 나눠지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의 우상숭배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면이 있습니다.
물론 우상숭배라는 의미에서는 다 잘못된 것이고 죄악이기 하지만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눠지기 전까지는 우상숭배를 하더라도 이들은 하나님을 왜곡되게 섬긴 형상숭배지 다른 신을 국가적으로 섬긴 배교가 아니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에는 시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경 출애굽기 32장을 찾아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32장 설명]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이유는 다른 신을 섬긴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왜곡되게 잘못알고 섬기려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도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 우리도 막상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찬양을 한다고 하고 있지만, 기도를 하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예배하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있다면 그것 역시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라는 사실입니다.
여하튼 이스라엘 백성들이 남북으로 나눠어지기 전까지는 그랬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남북이 갈리고 난 후,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이 이세벨이라는 시돈땅의 여인을 왕비로 맞이하면서 북이스라엘의 국가 종교가 바뀌게 됩니다. 잘못되긴 했어도 하나님을 섬기던 이스라엘 종교가 전혀 다른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종교로 배교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나타난 것입니다. 왜요? 엘리야의 이름의 뜻이 무엇이기 때문입니까? “여호와가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즉 이 말은 종전까지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기던 사람들이 또 다른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섬기게 되면서 참 하나님이 여호와인지, 아니면 바알과 아세라신인지 헤깔리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신, 참신이 누구인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 줄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 450명과 대결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참 하나님이 바알이 아니라, 아세라가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선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엘리야 선지자를 세우신 것입니다. 엘리야가 뜬금없이 아합왕이 다스리던 시기에 나타난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가 사르밧과부 집에서 먹을 것이 끊기지 않게 하고, 그 과부의 아들을 다시 살리고,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들과 싸우고, 비를 오게 하고, 까마귀들이 엘리야를 먹이는 등등 이런 이야기를 통해 바알이 하나님이 아니라, 아세라가 하나님이 아니라, 여호와가 진정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참 신이십니다. 약한 자를 강하게 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면 엘리사는 또 왜 등장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역시 엘리사라는 이름의 뜻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엘리사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나의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선지자 엘리사가 활동하던 시기는 북이스라엘과 아람 즉, 지금의 시리아와 잦은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람군대로부터 전쟁의 위험과 생명의 위험에 노출되어 괴로움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북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신은 바알과 아세라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를 일으켜 세우셔서 진정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분은 바알신도 아니고, 아세라신도 아니라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선포하시고자 ‘나의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는 이름의 뜻을 가진 엘리사를 들어 쓰셔서 진정한 구원은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선포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오늘 본문의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좀 특이합니다. 왜냐하면 한 이방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참된 구원자는 하나님이심을 써 내려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시리아 왕의 군사령관 나아만 장군은, 왕이 아끼는 큰 인물이고, 존경받는 사람이었다. 주님께서 그를 시켜 시리아에 구원을 베풀어 주신 일이 있었다. 나아만은 강한 용사였는데, 그만 나병에 걸리고 말았다.
여러분! 나아만이 누구라고 말합니까? 시리아 즉, 개역한글성경에는 아람군대라고 되어있는 이방나라의 군사령관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입장에서 보면 시라아는 북이스라엘의 적국입니다. 또한 나아만은 그 적국에서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군사령관이었습니다. 근데, 이 군사령관이 무슨 이유였는지 모르지만 그만 나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 나아만 장군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나아만은 자신의 나라에서 높은 지위의 사람이었습니다. 감히 남들이 쥘 수 없는 막강한 권력과 명예를 한 손에 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소에나 전시에 그가 입고 다니던 옷은 다른 사람들과 견줄 수 없는 화려한 옷이나 튼튼한 갑옷을 입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가진 외모는 누구보다 화려했으며 다른 사람들을 기죽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화려한 복장 안에 숨어있는 그의 육신과 그의 진짜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나병이라는 병으로 인해 썩어 가고 고약한 냄새가 나지 않았겠습니까? 사람들 앞에 설 때는 온갖 화려한 옷으로 치장하고 있지만, 남들 앞에서는 근엄하게 웃고 태연한 척하고 있지만, 그 속은 냄새나고 썩어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 나아만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혹여 나아만 장군의 모습이 지금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모습같지는 않습니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괜찮은 척,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태연한 척,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우리 가정과 사업장에 아무 문제없는 척 하지만, 실상은 냄새나고 어딘가 모르게 썩어가고 있고 곪아 터지기 일보직전인 그런 인생을,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모습은 안녕하십니까?
그리고 나아만 장군은 자신이 나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서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별의 별 노력을 다 했을 것입니다. 온갖 좋은 약이란 약은 다 써 보았을 것입니다. 신통하다는 의사는 다 찾아 다녔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나아만장군의 지위 정도면 뭐라도 해도 할 수 있었고, 최고의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치유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없었을 때 마지막으로 자신의 나라의 신에게 의지하여 고쳐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가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네, 고칠 수 없었습니다.
오늘 성경은 나아만 장군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모습도 바라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우리의 모습이라고 말입니다. 문제 앞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임을 똑바로 쳐다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문제가 생기면 나아만 장군과 같이 우리의 가진 것을 총동원해서 해결해 보려고 합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경험과 가진 것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어느 것 하나라도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있었냐라는 것입니다. 만약 나는 내 문제가 내가 잘 해결하면 살아왔다고 자부하거나 생각하시는 분이 계시다면 아직 하나님의 손맛을 덜 본 사람입니다. 우리는 우리 문제의 어떤 것도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7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그 편지를 읽고 낙담하여, 자기의 옷을 찢으며, 주위를 둘러보고 말하였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신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이렇게 사람을 보내어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하니 될 말인가? 이것은 분명, 공연히 트집을 잡아 싸울 기회를 찾으려는 것이니, 자세히들 알아보도록 하시오."
[7절 말씀의 배경 설명]
여러분!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진정한 구원을 이루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은 누구십니까? 한번 따라 하겠습니다. “엘리사”
우리의 구원은 ‘나의 하나님은 구원이시다’라고 고백하는 순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병에 걸려 소망이 없던 나아만 장군이 찾아간 곳이 어디입니까? “엘리사”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구원”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열왕기하 5장의 나아만 장군 이야기는 바로 ‘하나님만이 우리의 구원되심’을 선포하고 있는 사건입니다.
또 나아만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방나라의 사람이었습니다. 이 이방 사람이었던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가 고침받았다라는 것은 이방 사람들도 구원자되시는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구원받고 치료되어 질 수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열방을 구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나아만이 고침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의 종들의 말을 듣고 그래도 순종했기 때문에 고침받은 것이 아닙니다. 또한 엘리사 선지자가 능력의 종이라서 나아만 장군을 고친 것이 아닙니다. 나아만이 고침받을 수 있었던 것은 저주받아 죽어 마땅한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나아가면 치료해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하나님만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시기 바랍니다. 오직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께만 고정하시기 바랍니다.
여하튼 나아만이 엘리사를 찾아 갔습니다. 하지만 나아만은 엘리사로부터 뜻밖의 얘기를 듣게 됩니다. 10절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엘리사는 사환을 시켜서 나아만에게, 요단 강으로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장군의 몸이 다시 깨끗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나아만의 반응이 11-12절에 나옵니다. 함께 보시기 바랍니다.
11 나아만은 이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발길을 돌렸다. "적어도, 엘리사가 직접 나와서 정중히 나를 맞이하고, 주 그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상처 위에 직접 안수하여, 나병을 고쳐 주어야 도리가 아닌가?
12 다마스쿠스에 있는 아마나 강이나 바르발 강이, 이스라엘에 있는 강물보다 좋지 않다는 말이냐? 강에서 씻으려면, 거기에서 씻으면 될 것 아닌가? 우리 나라의 강물에서는 씻기지 않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하고 불평하였다. 그렇게 불평을 하고 나서, 나아만은 발길을 돌이켜, 분을 참지 못하며 떠나갔다.
여러분, 방금 전 읽었던 본문에는 번역되어 있지 않지만, 우리가 가진 성경 개역한글판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함께 한 번 찾아 보겠습니다. 열왕기하 5장 11절(p. 568)입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내 생각에는 저가 내게로 나아와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당처 위에 손을 흔들어 문둥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뭐라고 나아만이 말합니까?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가로되’ 무엇이라 합니까? “내 생각에는”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 나도 모르게 이렇게 신앙생활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말씀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요? “내 생각대로”입니다.
예배를 드림에 있어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나 혼자서 집에서 드리면 되지 굳이 교회에 나가서 기도할 필요가 있나?’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 아십니까?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에게서 요단강에 내려가 일곱번 씻으라고 했을 때 뭐라고 했는지 말입니다. 12절의 말씀입니다.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12 다마스쿠스에 있는 아마나 강이나 바르발 강이, 이스라엘에 있는 강물보다 좋지 않다는 말이냐? 강에서 씻으려면, 거기에서 씻으면 될 것 아닌가? 우리 나라의 강물에서는 씻기지 않기라도 한다는 말이냐?" 하고 불평하였다. 그렇게 불평을 하고 나서, 나아만은 발길을 돌이켜, 분을 참지 못하며 떠나갔다.
뭐라고 그럽니까? 굳이 요단강에 가서 씻을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 보다 더 좋은 곳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나라에 아마나 강이나 바르발 강이 요단강 보다 더 낫다고 합니다.
꼭 우리의 모습과 같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들이 말합니다. 굳이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릴 필요가 있냐? 교회에서 기도할 필요가 있냐? 굳이 새벽에 교회에 나가서 기도할 필요가 있냐? 집에서 해도 무슨 문제가 되겠냐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분들입니다. 기적은 ‘내 생각에는’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적은 내 생각을 버리고 ‘요단강’을 향해 내려갈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기적이 볼품없어 보이는 요단강에서 일어난 것처럼, 어떤 이들이 생각하는 설마 교회에서 일어나겠는가 하는 그 교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의 말씀과 약속이 그곳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오늘 이 새벽, 여러분 정말 잘 나오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의 놀라운 역사를 맛볼 수 있을 줄 믿습니다. 기적을 체험하게 되실 줄 믿습니다.
예배와 기도는 반드시 ‘요단강’에 내려가서 드려야 합니다. 그때 치유의 역사가 있습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드릴 때, 교회에 와서 기도할 때,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썩어있는 우리를 치료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나의 슬픔과 고통을 해결해 주실 분은 누구입니까? 나의 상처와 아픔을 치료하시고 나의 눈물을 닦아 주실 분은 누구이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은 누구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른 곳에 가서 해결받으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 찾아가서 해결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낫게 하시고 고쳐주시고 치료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 분께 우리의 모든 문제를 내려놓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이 반드시 응답하실 줄 믿습니다.
오늘 기도제목이 있으십니까? 오늘 기도할 때 응답의 역사가,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나의 삶이 변화되어지고 싶으십니까? 이제는 바뀌고 싶습니까? 성령충만한 삶을 살길 원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우리 삶의 주인으로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삶의 중심에 초대하시기 바랍니다.
기적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