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강해

베드로전서 5:1-11(하나님 뜻대로 사는 삶)

오비도제일장로교회 2020. 5. 6. 02:38

하나님 뜻대로 사는 삶

(베드로전서 51-11절)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27년이 지난, A.D. 54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로마제국의 5대 황제로 네로(37-68)가 등장하게 됩니다.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박해는 바로 이 네로 황제로부터 시작되게 됩니다.  

 

네로는 황제로 즉위한 후 초기 5년 동안은 근위대 장관이었던 브루루스와 당대 뛰어난 철학자이며 자신의 스승이었던 세네카의 후원을 받아 훌륭하게 황제의 직무를 행사했습니다. 그는 해방된 노예들을 정부 기관에 등용했고 세금을 감면했으며 매관매직을 근절시키고 원로원의 의견을 존중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삶은 끝도 없는 쾌락과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더 잔인해지고 폭력적인 사람이 되어가면서 재위 5년째인 A.D. 58년부터는 국정을 돌보지도 않고 오로지 방탕한 생활만에 빠져들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이복 동생과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아내를 죽이는 일을 스스럼없이 자행합니다. 자신을 지켜주던 근위대 장관인 브루루스가 병사하고 세네카마저 은퇴하자 거의 반미치광이가 되어 버립니다.

 

마성에 사로잡힌 네로는 헬라 문화에 흠뻑 빠져 들게 되면서 당시의 로마시를 없애고 헬라적 예술도시로 로마시를 다시 건축하겠다는 망상으로 급기야는 A.D. 64, 로마시 전체에 불을 지르게 됩니다.

 

이로 인해 로마의 화재는 무려 7일간이나 계속되었고 불길이 잡힌 뒤에도 3일간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이때에 14개 구역의 로마시 중에 10개 구역이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습니다. 로마의 화재가 진압되는 과정에서 네로 황제가 헬라적인 새로운 로마시를 건설하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방화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또한 그가 시적 감흥을 얻기 위하여 로마를 방화했다는 소문이 돌자, 로마 시민들은 분노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자 네로는 당황하여 그 방화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뒤집어 씌우게 됩니다. 그리하여 네로 황제는 로마의 화재가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각종 우상숭배를 증오하여 일으킨 방화라고 선포하고 기독교인들에 대한 체포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로 인해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체포되었고 그들은 네로의 잔학한 방법들에 의하여 죽어갔습니다.

 

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짐승들에게 찢기워 죽게 하거나 때로는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거나 또는 화형에 처했으며 심지어 자신의 정원에 나무를 세워 그리스도인들을 묶어 놓은 후 사람들에게 기름을 발라 불을 지름으로써 그들을 인간봉화가 되게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 서신을 쓸 당시가 바로 이 네로 황제의 폭정이 극에 달하던 시기, 즉 기독교 박해가 가장 극심한 시기였습니다. 로마의 박해로 인해 성도들은 곳곳으로 흩어져서 불같은 시험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에 사도 베드로는 자신의 서신을 통해 성도들을 격려하고 소망을 불어 넣어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 것입니다.

 

비록 지금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과 시련은 너무나 힘든 것이지만, 끝까지 견디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늘의 영광을 말하면서 믿음의 시련을 이겨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베드로전서는 1장부터 교회 내의 각 계층의 성도들에게 어떻게 믿음생활하는 것이 믿는 자들의 진정한 신앙의 본보기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오늘 우리가 읽은 5장은 특별히 교회의 리더쉽들에게 믿음의 본을 어떻게 보여야 하는지를 말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5장 말씀인 교회 리더쉽들에게 전하는 사도 베드로의 말씀을 통해 함께 은혜 나누길 원합니다. 먼저 1절 말씀을 다시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 장로로 있는 이들에게, 같은 장로로서, 또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앞으로 나타날 영광을 함께 누릴 사람으로서 권면합니다.

 

1절 말씀에서 베드로는 자기 자신을 먼저 소개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소개하고 있습니까? “장로이면서 또한 자신을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증인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물론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증인이라는 하면 어떤 사실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그 사실관계를 다 알고 있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어떤 법적 효력의 장소에서 사실 관계를 명명백백하게 밝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절에서 사도 베드로는 자신에 소개할 때 자신을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가 증인이긴 증인인데 무슨 증인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증인라고 말씀하고 있다구요? 고난의 증인이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소리인지 아십니까?

 

사도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사실과 그가 받으신 고난이 어떤 고난인지를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고난이 무엇인지 몰라도 자신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고난을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주님이 당하신 고난이 무엇인지 잘 알고 계십니까? 우리 주님께서 어떤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이사야 534-6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함께 찾아 보겠습니다. P. 1033)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 주님이 당하신 고난은 우리의 허물 때문에 받으신 고난입니다. 우리의 죄악으로 채찍에 맞으신 고난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죄로 인해 우리 대신 고통당하신 고난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자신을 말할 때,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라는 말은 내 죄를 대신 지고 고통받은 분임을 나는 잘 안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베드로의 자기 정체성이 보입니다. 어떤 정체성입니까? 바로 자기 자신이 죄인이었다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우리의 정체성을 잘 알고 있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잊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교만과 자만의 나락으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를 의로운 자라 착각하면서부터 다른 이들을 정죄하는 데 무감각해져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만 의로운 자로 생각하고 용서와 관용의 미덕보다는 자신만의 정의의 잣대로 다른 이들을 판단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잘 알아야 합니다. 적어도 사순절을 보내고 있는 우리는 우리의 이전 신분이 무엇이었는지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의로운 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이 인정하시든, 하지 않으시든, 우리는 성경이 말하고 있는 데로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그것도 보통 죄인이 아닌, 극악무도한 죄인이었습니다. 바울의 고백처럼 죄인 중에 괴수였습니다. 어느 누구 할 것없이 우리 모두가 괴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감당하고 고난받으심으로 우리의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그게 어떤 신분입니까? 1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타날 영광을 함께 누릴 사람이라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즉 영원히 죽을 수 밖에 없던 죄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앞으로 나타날 영광, 무엇입니까? 영원한 삶, 즉 부활의 영광을 받은 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앞으로 나타날 영광만 생각하면 참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언젠가 주님 앞에 설 테인데, 우리 주님 앞에 서면 나의 죄악이 낫낫이 다 드러날 터인데, 과연 나는 진정으로 회개한 자인지 두려움에 쌓일 때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언젠가 우리 주님 앞에 서게 될 때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자신이 있으십니까? 우리 주님 앞에 당당하게 서기 위해 선행되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철저하게 회개입니다. 우리는 뼈 속 깊은 곳까지 뿌리박혀 있는 죄를 위해 철저한 회개를 하였습니까? 사순절 기간입니다. 적어도 이 기간만큼, 우리의 의로움을 바라보지 말고 철저하게 우리 자신의 죄를 회개할 수 있는 기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십시오.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진하여 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여 할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

 

사도 베드로는 오늘 교회 리더쉽들에게 말합니다.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마 베드로는 일평생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마지막 유언하신 말씀을 마음 속에 죽는 그날까지 품고 살았을 것입니다. 갈릴리 호수가에서, 사명을 잃어 버리고 자포자기했던 그에게 주님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부끄러움에 고개 들지 못하고 있는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양을 먹이라

 

(정말 감동적인 말씀아닌가? 주님의 양을 먹이라는 말씀, 부족한 나에게 주님의 양을 맡기신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런 생각만 하면 참 벅차오른다.)

 

그래서 그는 평생 우리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양을 먹인다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도로 자신도 주님 앞에 다짐을 했지만, 어려운 환경과 여건 앞에서 수도 없이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많았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 일 하다보면 하루에 수십번도 포기하거나 도망가고 싶은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보니 억지로 억지로 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일은,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은 억지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베드로는 알게 된 것입니다. 억지로 하면 힘도 들고 포기하고 싶고, 결과도 생각지도 않게 꼬이게 되는데, 이런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2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떼를 먹이십시오. 억지로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진하여 하고, 더러운 이익을 탐하여 할 것이 아니라, 기쁜 마음으로 하십시오.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억지로 하면 일이 꼬이는데,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데, 힘이 드는데, 하나님의 뜻대로 일하면 된다라는 것입니다. 내 뜻대로가 아니라, 내 생각대로가 아니라, 내 경험대로가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행전 202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지금 사도행전 2028절의 말씀에서 우리를 일군 삼으시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다스리게 하신 것이 누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바로 성령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하나님의 뜻대로 일한다는 것은 바로 성령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내어 맡긴다는 뜻입니다. 내 생각이 아니라 내 경험을 믿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일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비록 내 생각에는, 내 이성에는 맞아 보이지 않아도 성령께서 이끄시는 그 인도하심을 좇아 가 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바로 내 의지를 철저하게 십자가 아래 죽이는 것입니다. 근데 어떻게 내 의지와 고집을 죽입니까? 사순절 기간 초대교회 성도들이 했던 3가지 일을 하면서 나를 철저하게 죽이는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기도입니다. 금식입니다. 기도하고 금식할 때, 내 의지를 꺾을 수 있고, 내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사순절 기간 우리가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3절 말씀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맡은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3절 말씀에서 사도 베드로는 교회 안에서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어떤 권면입니까? 교회 안에서의 리더쉽들이 가져야 할 덕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3절 말씀 가운데 독특한 뜻을 가진 단어가 있습니다. “맡은이라는 단어입니다.

 

맡은이라는 단어는 여호수아서에서 이스라엘 지파들이 가나안 땅을 분배받을 때 제비뽑아 할당되어진 땅을 의미하는 뜻입니다. 즉 다시 말해 3절에서 여러분이 맡은 사람들이란 주님께서 우리에 할당하여 주신 영혼이라는 말입니다.

 

이 영혼들이 누구입니까? 만약 이곳에 교구장님들이면 계시다면 교구장님들이 맡은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속장님들과 교구원들일 것입니다. 만약 이곳에 속장님들이 계시다면 누굴 말하는 것입니까? 속원들일 것입니다. 만약 목회자들이라면 누굴 말하는 것입니까? 성도들입니다.

 

근데 이것이 비단 교회 안에서 사역적인 부분에서만 국한되는 말이겠습니까? 우리 가정에서는 누구이겠습니까?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할당하신, 나줘주신 자녀들입니다. 그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든, 잘하지 못하든, 그 자녀들이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든,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약한 몸을 가지고 있든, 우리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모두가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모든 사람들에게, 이 모든 사람을 맡은 우리에게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모범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을 지배하려 하지 말고, 그들의 모범이 되라고 말씀합니다. 근데 모범이 되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교회 안에서 목사로서, 장로로서, 권사로서, 집사로서 우리는 모범이 되고 있습니까?

 

제가 얼마전 새벽기도 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제가 소위계급장을 달고 광주 보병학교로 소대장 교육을 받으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소대장 구호가 있었습니다.

 

1991년 걸프전을 계기로 육군 소대장의 구호가 바뀌었습니다. 걸프전 이전까지 약진 앞으로라는 구호를 소대장들이 많이 외쳤습니다. 하지만 걸프전이후

 

나를 따르라

 

교회에서 직분을 가진 우리는 자신있게 성도들에게, 교구원들에게, 속회원들에게 나를 따르라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솔선수범하는 것이 쉽습니까? 쉽지 않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자기 희생과 자기 부인의 삶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쉽지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변하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베드로전서 54절 말씀을 읽고 많이 울었던 적이 있습니다.

 

(올랜도에서 사역하면서 쓸개 제거 했던 시절 간증: 언젠가 목양칼럼에서도 썼듯이 나는 개인줄 알았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 우리 주님의 우리 눈물을 닦아주시며 영광의 면류관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끝까지 경주하시는 사랑하는 성도 모든 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힘들어도, 어려워도 끝까지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합니다.

 

하지만 믿음을 끝까지 지켜 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삶 속에 생각지도 않은 일들로 인해 두려움과 불안과 걱정과 근심에 빠지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과 불안과 걱정과 근심이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다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인간적인 생각과 방법으로 세상을 따라가며 살게 합니다.

 

그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7절의 말씀으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우리에게 생각지도 않은 일들이 터져서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과 불안과 걱정과 근심에 쌓이게 할 때, 그 때, 그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성경 빌립보서 46-7절 말씀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오늘 이 아침 로마황제의 박해로 인해 두려움과 불안과 걱정과 근심에 둘러쌓여 있는 성도들을 향해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라고 외치는 사도 베드로의 외침이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세상의 염려와 걱정으로 인해 진정한 그리스도의 삶을 살지 못하고 자꾸 주저하게 하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오직 하나님께 모든 염려를 맡기라도 말씀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우리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때 안전할 수 있음을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손길이 우리를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인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주님 안에서 평안을 얻을 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말입니다. 오늘 이 아침 주님의 뜻 안에서 내 뜻보다 크신 주님의 뜻을 바라보고 우리의 모든 간구와 소원을 이루어질 주실 주님께 기도하며 나아가길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