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8:18-22(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8:18-22)
우리는 흔히 공생애 3년간의 시간을 가나안 땅에서 보내시면서 예수께서 갈릴리라고 하는 좁은 땅에서만 머물러 계시다가 나중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붙잡혀 죽으셨다고 간단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이 사는 지역을 벗어나본 적이 없고, 그냥 좁은 땅 안에서만 사시던 분이라고 생각하기 쉽다는 말입니다.
물론 유대인들이 살던 가나안 땅은 사실 좁은 땅입니다. 가나안 땅을 우리나라와 비교해 보면 기껏해야 강원도 정도의 크기일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께서 그 좁은 땅 안에서만 살던 분으로 생각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는 결코 한 곳에 머물러서 거기에 예배당 짓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설교하던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끊임없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사람을 찾아다니시고 말씀을 전하시던 순회전도사였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특히 유대인들에게만 가셨던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의 땅에도 가셨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태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적어도 두 번은 이방인들의 땅에 가셨습니다. 예수께서 정식으로 복음 선포 사역을 시작하시는 장면이 마태복음 4장 12-13절에 나오는데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그리고 이어서 17절에서 말하기를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고향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으로 가서 살게 된 것이 공생애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가버나움은 예수 선교 사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산상수훈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께서 들어가신 곳도 가버나움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바다 건너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시는데 그곳에 갔다가 다시 건너 오셨을 때도 역시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이후 또 여기저기 다니시던 예수께서는 17장 24절에 이르러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다가 거기서 몸과 마음을 추스르신 다음 마침내 고난이 기다리고 있던 유대 지방 예루살렘을 향해 떠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의 선교사역의 중심지는 바로 가버나움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가버나움에는 예수께서 머무셨던 집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13장 1절에 보면 “그 날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고 되어 있고, 이어서 36절에 보면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머무르실 집, 음식을 먹고 휴식을 취할 집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물론 그 집이 예수님의 집인지 다른 누구의 집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지난주에 본 것처럼 베드로의 집인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예수는 가버나움이라는 도시를 근거로 해서 그 도시 안에 있는 한 집을 숙소로 정해 놓고 끊임없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복음 선교사역을 하시던 분이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에 의하면 가버나움에 있는 베드로의 집에서 휴식을 취하신 예수께서는 이제 제자들에게 건너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건너편은 28절에 의하면 가다라 지방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데가볼리라고 부르는 이방인 지역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을 상대로 설교도 하시고 기적도 행하신 예수께서 이제 처음으로 이방인들의 땅으로 건너가자고 말씀하신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는 단순히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두 사람이 나타나서 예수께 말을 걸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율법학자였다고 복음서 기자는 증거합니다.
율법학자, 그야말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요, 존경받는 랍비였던 사람들입니다. 안정된 직업으로서 먹고 사는 데 어려움이 없던 사람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그가 주님께 와서 말했습니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아뢰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대단한 각오를 한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그래, 따라 오너라’하고 말씀하시면 될 일입니다. 그렇잖아도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 배운 사람이 별로 없는데,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무식한 놈들이라고 비웃음을 사고 있는데 유대 지도자 중 하나인 율법학자가 주님의 제자가 된다면 그만큼 주님의 위상도 높아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아니,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니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을 나는 새도 보금자리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요? 이건 틀린 말이 아닙니까? 분명히 예수는 가버나움이 근거지이고, 거기에 머무르고 휴식을 취할 집이 있는 것을 우리가 보지 않았습니까? 그야말로 그 집이 누구 이름으로 되어 있는지, 예수님 이름인지, 베드로 이름인지, 다른 사람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쉴만한 집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분명히 가버나움을 근거지로 삼으셨고, 한 집에서 쉬기도 하셨지만 그러나 그분이 당신 이름으로 집을 사 놓았을 리도 없고, 또 물질적으로 욕심을 가지신 분도 아니었을 것은 틀림없습니다. 예수께서는 그야말로 세상적인 욕망이나 육신적인 편안함 등은 다 버리신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당신을 따르겠다는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가 과연 네가 가지고 있는 율법학자로서의 지위와 안락함, 세상적인 욕망과 편안함을 버릴 수 있겠느냐?”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불확실성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알 수 없는 상황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적인 조건은 다 포기하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하나님과 친교를 갖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결코 그런 것들을 염려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하루하루 염려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한테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힘들지만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채워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에서 주님은 율법학자에게 바로 그렇게 살 수 있겠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즉 네가 지금까지 누려왔던 것들, 율법학자로서 누려왔던 기득권, 율법학자로서 받아왔던 존경심, 율법학자로서 누려왔던 편안한 삶, 그것을 버릴 수 있느냐, 나를 위해서 희생할 수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이제 두 번째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마태는 증거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님,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세상에 아버지의 장례를 잘 치루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특히 유대인들은 장례를 잘 치루는 것이 가장 큰 효도라고 생각했고,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귀한 선행이 바로 장례를 돕는 일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미쉬나에 의하면 “자기 앞에 시신을 모신 때에는 쉐마(신앙고백문)을 외우는 일과 18단 기도문이나 기타 기도문을 바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고, 탈무드에는 “율법에 명시된 모든 명령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까지 기록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유대인들은 장례예식을 너무나 중요하게 여겼고, 특히 부모님의 장례식을 최선을 다해 치렀습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는 제5계명 즉,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을 어기는 크나큰 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예외가 있다면 레위기 21장과 민수기 6장을 근거로 해서 대제사장과 나실인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헌신해야 하는 사람들이었기에 특별히 아버지의 시신을 만질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제자는 대제사장도 아니요, 나실인도 아니기에 당연히 아버지의 장례를 치러야 했습니다. 그것을 하고나서 주님을 따른다고 해도 특별히 큰일 날 일도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만일 아버지 장례를 치루지 않고 주님을 따라 나선다면 틀림없이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당하고 욕을 먹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모를 리 없는 예수께서 뜻밖에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아버지의 장례도 치르지 말고 당신을 따르라고요?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내버려 두라고요? 아니 죽은 사람들이 어떻게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른다는 말입니까?
물론 문자 그대로 죽은 사람들이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를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여기서 예수께서는 충격적인 표현을 씀으로써 제자라고 부르던 그 두 번째 사람에게 참다운 깨우침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예언자 엘리야를 아시지요? 혼자서 갈멜산에서 450명의 이방신 예언자들과 싸워서 이긴 사람입니다. 그가 그 싸움에서 이겨놓고는 왕비 이세벨의 칼이 무서워서 호렙 산의 동굴로 도망을 갔었습니다. 거기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부드럽고 조용한 음성 가운데 나타나셔서 엘리야에게 힘을 부어주시고 다시 다마스쿠스로 보내십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힘을 내어 돌아가다가 엘리사를 만나는 장면이 열왕기상 19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야가 거기서 떠나 사밧의 아들 엘리사를 만나니 그가 열두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데 자기는 열두째 겨릿소와 함께 있더라 엘리야가 그리로 건너가서 겉옷을 그의 위에 던졌더니 그가 소를 버리고 엘리야에게로 달려가서 이르되 청하건대 나를 내 부모와 입맞추게 하소서 그리한 후에 내가 당신을 따르리이다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돌아가라 내가 네게 어떻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엘리사가 그를 떠나 돌아가서 한 겨릿소를 가져다가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살라 그 고기를 삶아 백성에게 주어 먹게 하고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 (열왕기상 19장 19-21절)
엘리사도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먼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드린 뒤에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엘리야가 뭐라고 꾸짖었나요?
“돌아가거라.”
그래서 엘리사는 놀라서 곧 가진 것을 다 백성들에게 나눠주고 부모에게 인사를 하지도 않고 엘리야를 따라가서, 그의 제자가 되었다고 열왕기서 기자는 증거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의무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또한 예수를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의 출현 앞에 장례의식은 그 의미를 잃어버리고 맙니다. 예수만이 생명이시니 그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살았으나 죽은 자들이요, 따라서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에게 맡겨놓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따라오너라.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들이 치르게 두어라.”
자, 그러면 이제 어떻게 되었을까요? 첫 번째로 등장했던 율법학자나 이어서 등장했던 제자는 주님을 따랐을까요? 아니면 주님의 말씀이 너무 버거워서 그냥 떠나갔을까요?
오늘의 본문에는 그 대답이 나와 있지 않습니다. 또한 오늘의 본문과 같은 내용이 나오는 누가복음 9장 57-62절의 말씀에도 그 대답은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실 때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그들이 따를 경우 그것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마태복음 9장 9절)
그런데 이런 표현이 오늘의 본문에는 나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주님을 찾아왔던 율법학자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은 이런저런 생각 끝에 떠나간 것으로 보여 집니다. 마치 마태복음 19장에 나왔던 그 부자 젊은이가 쓸쓸하게 떠나간 것과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태복음 19장 21-22절)
여러분! 오늘 설교 제목은 ‘나를 따르라’입니다. 그러나 더 자세히 말하면 ‘두 번째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라고 정의 할 수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두 사람은 분명히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그 이유가 어찌 됐든 스스로 주님께 나아왔습니다. 분명히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두 사람은 주님께서 나를 따라오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먼저 주님께 찾아왔고, 자기들 입으로 주님을 따르겠다고 다짐하고 나아왔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났고, 주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주님께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고, 나도 주님을 찾아가 보아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래서 주님께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마음속으로 들려온 첫 번째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을 만나 주님께서 제대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거기에는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내 기득권을 포기하고, 세상적인 안락함을 포기하고, 참다운 진리를 따라나서라고 했을 때 그들은 거기에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여기서 그들이 두 번째 부르심에 응답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오늘의 본문을 우리들의 모습에 비춰보고 싶습니다. 저는 첫 번째 부르심은 교회에 나오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 이유나 동기가 어떻든 누구나 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그것이 없이는 결단코 교회 안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가 다 알지 않습니까? 어쨌든 마음속에 교회에 가자는 생각이 들어야 발걸음이 교회로 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나 첫 번째 부르심을 들어야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두 번째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하는가입니다. 첫 번째 부르심에 응답하여 교회 안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들에게 주님은 물으십니다.
“너는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따르겠느냐?”
“너는 네 모든 것을 희생하고라도 나를 따르겠느냐?”
“너는 과연 참된 생명이신 예수를 만났느냐?”
그것이 두 번째 부르심입니다. 거기에 과연 무엇이라 대답할 것인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이민 땅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처럼 살고 있습니다. 근데 문제는 정말 진정한 주님의 제자가 몇명이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시 무늬만 주님의 제자는 아닙니까? 교회 다닌다고 성경책 옆구리에 끼고 다니지만, 오늘도 여전히 헐레벌떡 교회에 뛰어왔지만, 과연 두 번째 부르심까지 듣고 거기에 응답하여 순종하며 사는 교인이 얼마나 될 것인가요?
우리 모두 이 두 번째 부르심에 응답하여 순종함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